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숲속의소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얼마전 후배들이 '사랑'에 대해 물어와서 그놈에 사랑이 뭣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

조금만 짚어보면 상충하는 성질로 인해 조화를 이루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보같은 착각에 빠지기 쉬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하게 되면 그와 가까워질 수 있고, 그 관계가 발전하면서 사랑도 유지될 수 있으며 이 사랑으로 남은 생을 함께 해 나가며 더 의미있는 사회적 실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러나 곰곰히, 그리고 나의 근래 경험에 비추면 그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분명치 않은 미심쩍스러운 무엇이 따라온다. 그 아닌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아니 이 글을 읽게 될 이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에 대해 수용하기 어렵다면, 인간의 경계를 장경태로 최소한 국한시켜본다면 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이유는 이러한 깨우침은 늘 갈데까지 간, 되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얻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또 어느새 아픈 그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 드는 뼈아픈 후회는 '사랑과 관계'는 전혀 다른 영역임에 틀림없다는 뒤늦은 각성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기대하는 바로 이어지는 '사랑하면서 좋은 관계,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일일 터이다. 그러나 '사랑과 (인간)관계'는 다른 원칙, 다른 질서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와 조화를 이루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언젠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사랑은 감기 같은 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감기는 내 몸안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무엇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생기면 없던 형체가 내 몸안에 형성되어 나를 괴롭힌다. 사랑도 내 안에 있기도 하고 없는 무엇이다. 사랑을 할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로 내게로 스며드는 사랑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럴만한 조건과 때가 되면 이미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미리 들어와버려 실체를 이루는 '감기'같은 것이다. 그 감기는 항용 몸살을 동반한다.

따라서 사랑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 나를 이루고 있으나 표현할 수 없는, 개념화할 수 없으며 일반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주관하는 신비롭고 모호한 영혼의 분야이다. 마치 노자의 도덕경 첫 장에 나온 '도'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닌 것처럼,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세계의 근원이다. 이러한 세계와 내가 만나거나, 신이 은밀하게 숨겨둔 마지막 섭리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잘 해보려고 해서 또한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안의 깊은 어떤 흐름에 주파수를 맞추고 나를 다스리는 일, 그러함을 통해 곧 세계와 사람에 대해 열릴 수 있는 어떤 섬세함을 만들어내는 일 이외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사랑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더우기 현대 사회에서는 평생을 살면서도 '진실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랑인가 싶었지만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상대방으로 인해 상처만 당하는 '사랑의 패자'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개인적 안식의 장소를 사랑으로 해결해보려는 '사랑의 구원'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들이 생긴다.

이와 반면에 관계는 이성의 영역이다. 사랑의 시작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관계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랑이 진척될수록 이유들은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냥 좋으며, 보고나면 생각나고 생각나면 보고싶어지는 맹목적인 방향으로 질주하지만, 관계는 이유와 목적이 더욱 분명해진다. 선후배 사이, 뜻을 함께 실현하고자 맺는 동료와 동지, 이익을 추구하는 계약당사자, 지식을 전수받는 선생과 제자 등의 관계이다. 저 사람의 신뢰를 기대하는 것, 저 사람을 통해 나의 발전을 모색하는 것, 그를 통해 내가 위로받을 수 있거나 도움이 되는 서로에게 필요를 주고 받는 영역이 '관계'인 것이다. (물론, 이 관계는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관계와 다른 뉘앙스를 갖지만). 관계는 노력하기에 따라 깊어지고 발전될 수 있으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깨어지기 쉽다. 사랑은 그 사람의 상처와 연약함이 연민과 배려라는, 어떤 지위를 갖거나 생물학적인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그가 걸어온 삶의 그늘진 언저리로 인해 그 사람과 같이 나도 아프고, 더 사랑하고픈 에너지로 만들어지지만, 관계의 영역에서는 실망과 짜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저 사람이 처음에는 안그랬었는데 왜 저런 바보짓만 할까, 내가 저 사람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리 연약하고 목적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너무 답답해 등등 그 사람의 세세한 부분을 따지는 끊임없는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문득 그의 시선에 미덥지 못하다는 느낌이 느껴질 때, 그의 얼굴이 마뜩찮음으로 차서 흉해보일 때 이미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관계로서의 '나'를 만나왔던 것이며,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에 그 관계마저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지게 된다. 그건 너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낳자마자 목적과 성과지상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적 성격, 개념화하고 법칙을 세우며, 있음과 없음을 나누고, 외부를 향한 주장으로 목소리를 내는 근대 학문과 문화적 조류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을 사랑할 수 있는 기질과 성향이 왜곡되거나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게 제압되기 때문이다. 이는 넓어진 자유영역이 완전한 사랑을 가능하리라 여겨졌지만, 그게 실현된 현대 사회에서 이혼률이 높은 것 그리고 사회운동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이혼율이 높은 것과 어떤 연관을 이루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것은 친밀한 영역에서도 교육받은 대로 외부를 향해 외치듯이 반려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평등해지기를 요구한다면 사랑의 영역이 어떻게 변질될지, 단일한 근대성으로만 표현될 수 없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요인, 지방적인 특성과 그가 살아온 주변 환경,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되는 어떤 복합물들이 얽혀 이루어진 사랑의 영역이 어떠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될지를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진정한 사랑은 끊임없이 안으로 안으로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살피는데서 비롯된다. 나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준비해두는 일, 지나치게 이성중심적으로 커버린 나의 각진 사고를 부드럽게하기 위해 동화책을 읽는 일도 좋다. 종교적 영성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존귀함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일, 사람뿐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연민의 영역을 넓히는 일, 시대가 제약하는 가치관의 선을 넘고자 노력하는 일은 곧 사랑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욕심도 내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그의 존재 자체가 고마울 뿐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사랑은 관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며, 제대로 잘 살게 하지 않나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한다. 사랑은 이성적 교육에 의해 축적되는 자양분들이 제대로 쌓이게 하는 토대이며, 이성의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쓰이도록 유도하는 힘이다. 나는 사랑에서 진 사람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것은 사랑은 우리 삶의 본원적 진리와 흐름에 정초를 두고 있다면, 관계는 부차적일 수 있는 도구적인 수단에 지향을 두고 있기에 사랑으로 아파하는 사람이 더 인간적인 면모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과 관계 중에서 사랑이 우선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랑을 우선에 두는 사람은 순수한 영혼의 공감을 갈구했기에, 모든 것을 주며 혼신을 다한다. 그렇기에 그 실패로 인한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 역시 사랑의 승자는 아니다. 그 역시 상대방을 통해 잊고 있었던 원천적인 인간본성의 고향을 만난다. 따라서 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자신의 사랑할 수 있음과 없음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고, 순수하게 자신을 대했던 그에게 정신적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아픔을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혼란스런 짧은 시간이 사랑과 관계의 조화를 접목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두 당사자가 해결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혼란스럽고 감당하기에 벅차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도 누구에게도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람과 사람의 진실한 만남에 대해 준비하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하간 사랑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아픔의 중심에 자신을 묻어두고, 자신의 한계 끝까지 밀어넣는 방식으로 해결지점을 찾고자 한다면,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의 사람은 외부의 다른 목적을 향해 맹렬히 추구함으로써, 그에게는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일뿐인 의례적인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의 치유방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성향과 밀접한 친밀성을 갖기 때문에 격렬한 몸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게 좋은 건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다시 저녁 식사자리의 화제로 돌아온다면, 둘 사이의 시작이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든, 필요에서 시작되었든 서로가 서로에 대해 바라는 기대치를 분명하게 얘기하는 일이 좋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서로 합의하면서 고쳐나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설혹 출발단계에서 바라는 바가 확인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확인하는 일이 좋다. 지금의 이 상황이 깨어질까봐, 어떤 가능성이 어긋날까봐 둘 사이의 분명한 정체성을 점검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머뭇거리다가는 누구 하나가 깊은 인간적인 상처가 예정되어있다는 일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사랑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향해 감각과 지각이 열려져 있으면 슬며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일생을 살면서 삶을 아름답게 유지시켜줄 수 있을뿐더러,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사랑. 세상을 이해하는 눈길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고, 각성의 폭을 충격적으로 넓혀주기도하는 엄청나고 혼란스런 경험인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불행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사랑과 관계'의 조화에 힘써야 하는 일이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그 의미가 강화되기도 하며, 관계 역시 사랑으로 심화되기도 한다. 친밀한 사랑을 통한 성숙한 관계는 분명 더 의미있는 일들을 추구하게 하는 본원적인 힘이며, 어떠한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위안처이기도 하다. 우리가 공부하는 사회학은 이런 사랑과 관계의 조화를 이루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공부라고 나는 확신한다.

몸밖으로 나간 줄 알았던 감기가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쉽게 아프다는 사실  또한 새삼 장경태 역시 인간임을  인식하게 하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085 노촌 이구영선생님의 전시회가 이틀 남았습니다. 3 박아영 2005.05.16
1084 풀이가 안됩니다.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8 김상출 2005.05.12
1083 스승의 날 특집 방송 보세요. 배움이 2005.05.12
1082 월간 작은책 창간 10주년 열린교실 작은책 2005.05.11
1081 나의 오월.. 김성숙 2005.05.11
1080 신영복님의 더불어숲 요약글 부탁드립니다..ㅠㅠ 1 이성현 2005.05.11
1079 생일 축하해요! 2 한상민 2005.05.10
1078 결혼을 축하합니다 - 황정일♡이지현 - 12 그루터기 2005.05.10
» 사랑의 위치와 관계의 자리 1 장경태 2005.05.09
1076 [re]경태선배.. 1 이상미 2005.05.13
1075 글 잘 읽었습니다.^^ 3 김동영 2005.05.09
1074 선비정신 소나무 2005.05.08
1073 새내기 신고글- 반구정,화석정, 자운서원 기행문 손태호 2005.05.07
1072 [re] 새내기 신고글- 반구정,화석정, 자운서원 기행문 권풍 2005.05.07
1071 [이구영선생님 글씨展]은 오전 10:30 ~ 오후 6:30 열립니다 장지숙 2005.05.11
1070 (벙개) 축!! 영일선배 생신!! 6 벙개 2005.05.04
1069 혁명 이 뜻을 알게 해 주는 글 1 육체노동자 2005.05.03
1068 답답한 마음으로.. 1 배형호 2005.05.03
1067 문제의 본질은 '돈'이다. 2 김동영 2005.05.03
1066 거짓말하는 여성계 권력은 가짜 페미니스트들이다 2 바위처럼 2005.05.03
Board Pagination ‹ Prev 1 ...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 167 Next ›
/ 16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