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론' 철학자 신영복의 함정
정문순
기사입력 2016-02-13 대자보.
신영복은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르네상스형 지식인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젊은 날 대학 강의를 맡게 됐을 때 그 학교에 교수가 별로 없어서 자신의 전공인 경제학 말고도 사회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과의 강의를 맡았다고 한다. 또 기나긴 수형 생활 덕분에 동양 고전을 공부할 수 있었다면서,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주역 같은 어려운 책을 평생 볼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촌수가 가까운 인접학문이 아니라 생판 서로 딴판인 것 같은 학문의 경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박학이 그에게 우연한 계기로 주어졌을 리 만무하다. 그의 광대한 지적 역량 중에서 나로서는 가장 감탄할 만한 게 문학비평 능력이다.
그러나 신영복에게 문학은 그의 박학다식을 증명해 주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에게 문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자질이다. 굴원의 ‘초사’를 통해 “우리가 갇혀있는 협소한 인식틀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한 신영복의 발언은, 그대로 문학 공부의 필요성을 웅변해주는 것이다. 문·사·철이 전통적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자질에 속했고 옛 지식인들에게 시서화악(시, 글, 그림, 노래) 공부가 강조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영복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옛 선비의 기풍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영복이 복고적인 가치관을 지향했다는 말은 아니다. 지식인으로서 신영복에게 앎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한 수기치인이나 수신제가 유형의 전통적인 지식인이 연상되는 것 못지않게, 그런 면모는 또 탈근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신영복은 지식이 세분화하고 삶과 유리되면서 지식이 직업적 방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앎과 지식이 책상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지행합일적 태도는, 오래 전에 전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실현되었던 과거이자 탈근대인 현대 이후에도 추구되어야 할‘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일본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가 중국 고전이나 역사 기록을 모태로 창작한 소설을 모은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1993년 국내 출판)에 쓴 추천사와 감역(번역 감수)에서 그의 탁월한 비평적 역량을 확인하면서 나는 시샘이 샘솟듯 했다. 텍스트를 떡 주무르듯 하는 장악력과 텍스트를 꿰뚫고 그 이면에 서린 작가의 의도를 파고드는 정밀한 이해력에 나는 탄복했다.
가령 이 책에 수록된 <산월기>라는 작품은 재능보다 욕심이 더 큰 '이징'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족한 능력에 좌절하여 산 속의 범으로 둔갑하고 만다는 중국 설화를 변용한 작품으로서, 이징의 패인은 “겁많은 자존심과 존대(尊大)한 수치심” 때문이라는 특이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존심에 ‘겁많다’는 표현을 쓰고 수치심에 ‘존대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상례적이지 않다. 일상적 관습을 초월한 이 표현에 대해 신영복은, 작가가 ‘겁많은 수치심’과 ‘존대한 자존심’을 일부러 뒤바꿔 쓴 것이라고 풀이한다. 만일 나라면, 이 문장을 이징이라는 소심한 사람이 자존심이 있어봤자 겁쟁이의 것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수치심 따위를 대단한 덕목인 양 떠받들고 살았을 뿐이라고 풀이하고 싶기는 하다.
신영복의 경우 이징이라는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성격 유형의 상호 얽힘과 교차로서 한 인간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뒤바꿈을 했다고 보았다. 나는 신영복의 해석이 얼마나 타당한지 가리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해석에서 그가 개별성보다는 총체성에, 개인의 독자성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철학에 집중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개인의 총체성에 집중하는 태도는 더 큰 총체성인 사회라는 맥락 속에 개인을 앉히는 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신영복은 그 스스로도 존재론보다 관계론 철학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그에게 존재론이 근대 철학이라면, 관계론은 탈근대 철학이다. 존재론이 자신을 남보다 높이고 타자를 업신여기거나 지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데 반해, 관계론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존재가 남의 기반이 되고 남이 ‘나’에 근거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망으로 얽혀 있다고 본다. 존재론이 약자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근대 역사를 만들어왔다면, 관계론은 공존과 공생, 공영, 남과 더불어 살기의 미래 역사를 일구는 데 이바지한다고 본다.
관계론에 대한 신영복의 집념은 대단한 것이어서 고대 주나라 봉건 시대의 신분 질서를 합리화한 <주역> 같은 고전도 관계론의 관점에서 읽어낼 정도이다. 또, “세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 “어려운 길도 함께 하면 즐겁다” 등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명언에서도 관계론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과 관계론을 완전히 서로 별개의 것 또는 공존 불가능한 것으로 대비하거나, 관계론을 존재론보다 우월한 것으로 못 박는 그의 태도는 자칫 세상을 단순화할 위험이 없지 않다. 따지고 보면, 존재론이 전제되지 않은 관계론은 무의미하다.
신영복의 시각에서, 독립적인 존재성 즉 근대적 시민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게나마 눈에 띄는 것도, 존재론보다 관계론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때문에 기인한지 모른다. 가령 신영복은 남자에게 의존적인 신데렐라 형 여성에 대한 대비로 평강공주를 끌어오면서(이런 식의 대비도 마뜩찮다. 신데렐라와 대조되는 씩씩한 현대 여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굳이 고대 역사를 들추어내어 찾은 것이 하필이면 ‘양처’의 상징으로 통하는 평강공주인가), 온달 장군에게 헌신한 평강공주의 삶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영복은 “평강공주의 삶이 남편의 입신(立身)"이라는 가부장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평강공주의 이야기에 대해 한 여인의 사랑을 뛰어넘은 “‘삶의 메시지’”라고 옹호하고 있다. 평강공주의 삶은 남자에게 예속된 것이 아니라 ‘살림(生)’, 즉 ‘살리는 것’의 차원이라는 것이다.(『나무야, 나무야』) 신영복의 눈에는 바보 남편을‘살려서’ 빼어난 인물로 만드는 데 자신의 삶을 갖다 바치는 여성이 전혀 불편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눈으로,시대를 잘못 만나 천재성을 활짝 꽃피우지 못하고 일찍 져버린 난설헌 허초희는 높게 평가하고, 아들을 잘 만난 사임당 신씨에게는 불편함을 느끼니 신영복의 여성관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평강공주에 관한 한, 여성이 자신을 버리고 남자에게 ‘올인’하는 일방적 헌신과 희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신영복의 관계론 철학이 가진 맹점이자 한계이다. 아무래도 신영복은 존재론에 그다지 밝지 못하거나 자신이 천착하는 관계론 철학을 편협하게 이해하는 듯하다. 물론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영복의 지론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아직 시민권도 획득하지 못한 여성에게 자신의 ‘존재’가 아닌 남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온당하다고 볼 수 없다. 여성은 아직은 ‘존재론’이 더 필요한 존재이기에 말이다.
신영복은 먼 길을 떠났지만 그의 자취는 세상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 등의 구절은 누군가의 사무실 한 귀퉁이, 누군가의 수첩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물의 핵심을 간파하는 절묘한 표현이 그의 깊은 사유와 통찰에서 나왔음에도 세상은 그 과정은 쏙 빼버리고 그것의 결과물인 멋진 명언들만 향유하는 듯하다.
그가 자기 재능의 80% 정도만 요구하는 직장을 다녀보라고 젊은이들에게 조언할 때, 청년들이 보수에 집착하여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직장을 택함으로써 스트레스를 겪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본래 의도와 달리,이 말은 구직 중인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뜻으로 오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그럴 경우 절망적인 청년실업난이라는 사회문제를 호도하는 측면까지 있다.
심지어 그가 남긴 말이 소주 상품의 상표로 쓰일 때, 마치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자본에 의해 '혁명적으로' 소비되듯 그의 철학도 껍데기만 남아 상품으로 소비되는 위험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이를 막을 책임은 그한테 있었다.
신영복만큼 많이 읽히는 철학자도 없지만, 그만큼 얕게 이해되는 철학자도 없는 듯하다. 세상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아니면 세상에 자신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전에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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