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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상파울루의 길 위에서
각성은 그 자체로도 이미 빛나는 달성입니다
리우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를 잇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불현 듯 '제제'가 생각났습니다. 제제는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나오는 어린 주인공입니다.
나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길게 뻗은 고속도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고속도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고속으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실직한 아버지와 가난한 인디언의 딸을 어머니로 둔 제제가 달리는 자동차를 피해 무단으로 건너뛰는 놀이를 하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었지만 오늘 이곳에 서자 놀랍게도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 의외로 또렷이 달려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제제가 그토록 따르고 사랑했던 포르투가 아저씨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자식처럼 사랑해주던 아저씨에게 자기를 아들로 구입(購入)해주기를 부탁했던 그 포르투가 아저씨가 기차에 치어 죽습니다. 그 후로 제제는 기차를 향하여 '살인자'라고 외칩니다.
지금 고속도로변에 서 있는 나의 귓전에는 자동차를 향하여 외치는 제제의 목소리가 들려오 는 듯합니다. 브라질에는 넓은 국토에 비해 의외로 기차가 적습니다. 외국 자동차 회사의 막강한 로비로 철도망 대신 자동차 중심의 교통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제제에게는 오늘의 자동차와 그때의 기차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변함없는 가난입니다.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하루벌이가 1달러에도 못미치는 생존 한계선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집중해 빈민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850만km²에 달하는, 세계에서 국토가 가장 비옥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단 한 평의 땅도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이곳의 가난은 자연이 내린 재앙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300년간의 식민지 시대와 독립 후 200년간의 역사를 돌이켜보게 되고 20세기에 들어와 줄곧 매진해왔던 경제 개발의 전 과정을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동유럽의 붕괴가 사회주의의 실패라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실패라던 당신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파울루 시내에 있는 이피랑가 공원은 독립공원으로 불립니다. 그 넓은 공원 한가운데에는 브라질 독립을 기리는 청동 조각상들이 높은 대석 위에 위풍당당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독립을 선언하고 식민 모국의 군대를 격퇴한 독립의 역사를 표현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독립공원에서 읽는 독립의 의미는 청동 조각상보다도 훨씬 왜소한 것 같았습니다.
비단 브라질뿌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서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았다는 조국 광복의 감격을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광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분가(分家)라는 느낌입니다. 브라질의 경우만 하더라도 황태자인 돈 페드로가 포르투갈 본국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타민족의 침략과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던 우리의 역사의식에 비춰볼 때 그것은 광복이라기보다 계열사 분리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에 공통된 이러한 성격이 독립 이후 2세기에 걸친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그대로 일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박해, 고문과 처형과 쿠데타로 점철된 라틴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반세기 동안의 경제 개발 정책의 종착점이 된 '종속화의 길'이 어쩌면 이러한 라틴아메리카의 태생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외세와 외국 자본의 하부에 편입된 정치 권력과 그 하부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내국 식민화하고 있는 '중층적 변방화'의 현실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시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단 라틴아메리카만의 현실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 세기의 기본적인 세계질서인지도 모릅니다.

 

브라질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역사와 현실에도 아랑곳없이 이곳에 만연하고 있는 집단적 무의식입니다. 삼바 카니발과 축구에 대한 열광입니다. 무한한 낙천성입니다. 공원이나 골목마다 만나는 축구공이 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브라질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고뇌가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인구의 70% 이상이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임금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정책적으로 기피되고 식민지 시대 이래 줄곧 행해진 우민화 정책이 답습되고 있습니다. 교 육을 중립적인 지식의 주입이 아닌 명백한 정치 과정으로 규정하고 분노의 교육을 주장했던 프레이리의 교육론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전투적 해방자로 받아들인 해방신학, 그리고 공장과 농촌 부문의 조직화를 중심에 두고 제도 정치와 의회 행동을 당의 직접적 결정에 귀속시키는 노동자당(PT)의 정치 전략,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삶의 틀 속에 담아내려는 '기초 공동체'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었습니다.

 

브라질에는 물론 라틴아메리카 제국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업화되고 도시화된 근대 부문이 높은 성과를 이룩해놓고 있습니다. 인구 1,500명을 안고 있는 상파울루의 활기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현관이며 시장입니다.
수도 브라질리아는 미래를 향해 비상하는 제트기 형상으로 설계된 도시입니다. 브리질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와 루시오 코스타가 소위 '파일럿 플랜'에 따라 설계한 완벽한 계획도시입니다. 현대 도시, 미래 도시의 모범입니다. 이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대성당은 단순성과 예술성이 조화된 명작으로 일컬어집니다. 기둥 열여섯 개가 마치 정성스러운 손처럼 십자가를 받들고 있습니다. 파비오 네토가 세운 '은총의 사원'(Temple of Good Will)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리석 피라미드의 정상에 세계 최대의 크리스털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이 크리스털은 하느님의 뜻과 은총이 내리는 곳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미래 도시의 뛰어남이나 대성당의 예술성이 아닙니다. 크리스털의 눈부신 은총이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몇몇 가시적인 성가ㅗ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모순의 땅 브라질 이곳 저곳을 찾으면서 우리가 이끌어내고 극대화하여야 할 동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높은 하늘에 있거나 아득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많은 가난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이 이끌어내야 할 동력 역시 지극히 낮은 땅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무한한 잠재력을 깨우고 이끌어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고질화된 낙천성으로 말미암아 좀체 움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움직인다고 해도 이렇다할 성과도 이루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재력을 꺠우고 동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우직하고 꾸준한 노력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達成)'이라고 불러야 옳습니 다. 오로지 결과에 의하여 그 과정을 평가하고 거기에 쏟은 진솔한 노력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의미마저 읽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화려한 발전이라고 하더라도 이 거대한 잠재력을 억압하고 이룩한 발전이라면, 그것을 희생시키고 이루어낸 발전이라면, 그것의 본질은 기만(欺瞞)입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으려는 부정함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브라질의 광대한 땅에 묻혀 있을 동력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동력이 아직은 진로를 얻지 못하고 있을 뿐 용암처럼 지하를 뜨겁게 달구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브라질은 광대한 땅이 도리어 모든 가능성을 짓누르고 있는 억척같은 대지였습니다.

 

나는 제제의 친구이며 분신이었던 라임오렌지나무를 찾아보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자동차로 시골길을 달렸습니다. 사실은 브라질의 농촌을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브라질은 넓었습니다. 어쩌다 만나는 작은 마을에서는 울타리를 고치던 농부들이 라임오렌지나무에 대해 물어보는 우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듯한 집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목장 몇 개를 지나 오렌지 밭이 있는 작은 농가를 찾아들었습니다. 제제가 하루에도 몇번씩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던 라임오렌지나무를 찾았습니다. 라임오렌지는 이곳에 서는 리마(Rima)오렌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통 오렌지보다 열매도 작고 나무도 키가 작았습니다. 소설 속의 제제와 같았습니다.
라림오렌지나무는 아직도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라임오렌지나무는 제제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의 상징이면서 브라질의 현실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 들지 않고 이내 자리를 뜨는 우리를 할머니는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저만치 멀어져가는 우리들을 향해 등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2월에 열리는 삼바 축제 때 다시 브라질을 찾아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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