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정열의 나라, 마야와 아스텍 문명의 고장, 산악에서부터 사막, 정글, 그리고 아름다운 해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연을 만날 수 있는 나라, 아름다움과 지저분함, 부와 가난이 공존하는 나라. . .
멕시코에 대한 이러한 수사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역사와 자연에도 불구하 고 멕시코는 제3세계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적 고뇌를 남김없이 겪어왔고 또 지금도 짐 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라틴 음악의 리듬과 라틴 미술의 색조가 보여주는 라틴문화 특유의 느긋함이 이 모든 고뇌를 따뜻이 어루만져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50km지점에 있는 고대 왕국의 수도 테오티와칸의 피라미드에서 엽서를 띄웁니다. 이곳은 기원전 3세기부터 약 1천년간 번영했던 도시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도 인력 15,000명과 30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가 요구되는 장대한 규모입니다. 테오티와칸은 콘스탄티노플이 인구 20,000에 불과했던 당시에 20만 인구를 수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입니다.
이처럼 멕시코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우선 그 규모의 장대함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유카탄반도의 치첸이트사에 있는 쿠쿨칸신전에서도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춘분과 추분에는 어김없이 뱀의 환영이 나타나게끔 건축되어 있는 피라미드 계단에서도 경탄이 끊이질 않습니다.
태양력과 건축술의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탄의 대상은 비단 그 규모의 장대함이나 기술의 정교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유적에 담겨 있는 고도의 수학 (數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원주율(圓周率)과 '0'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지구 북반구를 43,000분의 1로 축소하여 피라미드를 만든 것으로 보아 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지구의 크기에 대한 정확한 계산법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학적 언어'는 유적의 물리 적 크기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이야기해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는 곳마다 안내자들의 설명과 관광객들의 경탄을 반복해서 듣는 동안 자꾸만 혼란에 빠져드는 느낌이었습니다. '필요와 용도'가 사라지고 난 후의 유적을 읽는 방법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야-아스텍 문명에 대한 모든 경탄은 결국 '피의 제전'으로 귀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잔혹성에 초점이 옮겨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돌과 흙의 무게를 계산하는 우리의 극히 단순한 물량적 사고는 물론이며 유적에 담겨 있는 수학적 언어에 대한 경탄마저도 결국 그 잔혹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바뀌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복당하고 파괴당한 문명의 유적이 겪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정복자의 세계관으로 재해석되는 유적들은 그것을 통하여 그들의 정신적 영역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준공하였을 때 포로 20.000 명의 심장을 도려내어 신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을 행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쿠쿨칸 신전을 방문하는 모든 관광객에게는 차크몰 석상의 가슴께에 놓인 접시와 그 접시 위에 올려졌던 사람의 심장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피의 제전' 그것은 과연 사실이였는가, 사실이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그들이 들어보이는 그림의 반대편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야-아스텍의 태양력에 의하면 우주에는 인간이 창조되고 난 후 대주기(大週期)가 네 번 있었습니다. 제1 태양으로부터 제4 태양에 이르기까지 네 개의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이 네 개의 태양은 물, 바람, 불, 홍수로 각각 4,000~5,000년의 수명을 마쳤으며 지금은 제5의 태양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야 비문에 기록된 태양력에 의하면 2012년 12월 23일에 지금의 태양은 종말을 고합니다. 인신공양은 이 다섯 번째의 태양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려는 그들의 간절한 기원에서 비롯된 의식이었습니다.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는 피의 제전은 매우 우매하고 잔혹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문화이든 그것은 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라는 전체적 체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을 따로 떼내어 확대하는, 소위 분(分) 과 석(析)의 잔인한 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트집잡아 그를 비난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모든 문명이 예외 없이 겪어온 우매한 과거사를 덮어두고 유독 마야-아스텍, 그리고 잉카 문명의 잔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라틴아메리카가 겪었던 잔혹한 식민지 역사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라틴아메리카가 파시즘을 합리화하고 그 잔혹성을 유화(宥和)하기 위한 역사해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생각하면 우리 나라 역시 잔혹한 식민지의 역사를 겪었고 우리의 많은 문화가 왜곡당했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왜곡과 아픔은 지금껏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끈질긴 멍에로 남는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후 마야-아스텍 문명이 직면한 운명은 한마디로 그들의 '태양'을 상실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상실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잔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1.600만이 살육당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테노치티틀란에 바쳐진 인신공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피를 뿌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신대륙 전체를 뒤엎은 거대한 '대륙적 비극'이었으며 아직도 재생산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입니다.
멕시코의 유적 앞에서 느끼는 심정은 참으로 무겁고 침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멕시코가 안겨주는 무겁고 침울함에서 오히려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희생으로서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의 희생으로서만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믿음은 정직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정직함이 내게 숙연한 반성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의 정직한 믿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들이 쏟아온 지금까지의 노력들을 돌이켜보게 하는 반성이었습니다. 수많은 방법과 이념이 인간구원의 이름 밑에서 추구되어 왔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피'로서 상징되는 인간의 희생만큼 순수한 것은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태양을 연장하기 위하여 행했던 인신공양이 우매하고 잔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우매함과 잔혹함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혹시라도 자기의 세계를 연장하기 위하여 서슴지 않고 바치는 제물은 없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인을 고루 비추는 태양이 아니라 사사로운 태양을 연장하기 위한 희생이라면,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로지 황금과 엘도라도의 꿈을 찾아 이 대륙을 찾아온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마야-아스텍 사람들은 '황금의 가치'를 모르는 미개인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매하기 그지없었던 그들의 삶이 유럽인들에게 숨길 수 없는 문화충격이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법이 없었으며, 사람을 속일 줄 몰랐으며, 용기를 최상의 미덕으로 여기고 가족과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애정으로 쏟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건강하고 병이 없었습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선언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사상 역시 신대륙에서 체험한 문화충격의 산물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몽테뉴 역시 그의 <수상록>에서 식인종 사회의 식인 풍습도 살아 있는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보다 낫다는 주자을 펼치며 종교 전쟁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을 비판하였습니다. 유럽 지성사에서 자기 만이 올바르다는 폐쇄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이 신대륙의 삶과 문화 였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럽이 신대륙에 상륙한 이후에 보여준 도도한 역사는 지성(知性)과 반성(反省)을 동시에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과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야성과 독선은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을 뒤덮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코르테스 이후로는 과거가 현재를 만드는 땅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만드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멕시코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차라리 미래를 기다리는 땅이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6의 태양을 기다리는 땅이어야 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