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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길’윤철호 편집국장과의 대담
1993년 5월호 「길이 만난 사람」
통혁당 무기수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신영복. 성공회신학대 교수 신영복.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접두사는 이렇게 바뀌어왔다. 그 변화 사이에는 그의 삶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다. 삶의 변화를 담고 있는 몇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그에게 이제 사색을 말할 만큼 삶의 자료가 새로 축적되었을까? 그의 감옥 밖으로부터의 사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4·19세대,6 ·3세대가 주목받는 요즘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그의 사색에 주목한다.
「《월간 길》편집자 주」
4월 11일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영복 선생과의 대화는 그를 20년 동안의 징역으로 몰아넣은 통혁당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8년도 발생한 통일혁명당 사건은 남파 공작원과 연결돼 주요지도원이 월북 교육을 받고 내려온 지하당조직으로 발표되었다. 김종태, 최영도, 이문규, 정태묵, 김질락, 윤상수 등이 사형 혹은 옥사했다. 김종태는 당시 42세로 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됐고 북한에서는 이틀 후 영웅칭호를 수여했다. 후에 북한에는 김종태 대학이 만들어졌다. 음습한 지하의 냄새와 찬 권총의 금속성 촉감을 연상시키는 이런 류의 사건과 그의 따뜻한 목소리, 부드러운 눈매는 사실 언제 봐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불일치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 사건 자체와 내가 겪은 것을 어느 정도는 분리할 필요가 있지요.”하고 말문을 연 그는 당시의 활동을 “개인적으로 선배들과 맺은 관계들 외에는 지금의 청년학생운동의 수준과 기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당시의 사회상황 속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59년에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그에게 대학 2년 때 맞은 4·19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전위적인 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서클활동에 적극적이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른 학교 학생들, 학교 밖에 남아 있는 드러나지는 않은 변혁의 전통과 만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전통과의 만남은 당시 이문규가 편집장을 맞고 있던「청맥」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연루되게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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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말하자면 4·19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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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한 얘기는 세대론으로 넘어갔다.
신 : 그렇지요. 하지만 시적 표현을 하면 4·19에서 5·16까지 잠시 열렸던 푸른 하늘을 보았던 세대라고 할까요. 단순히 부정선거의 여파로 4·19가 생겼다고 보지 않고 어떤 성격의 정치적 지배계층이 기층민중을 국내외적으로 어떤 구조로 지배해왔던가 하는 모습 구조를 정확히 인식했던 사회민족적 의식의 공유자를 4·19세대로 규정해야 할 겁니다. 그래야 70년대, 80년대 세대와의 연결성, 그 세대가 갖는 역사적 위치설정도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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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대를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출발로 보고 6·3세대와 4·19세대의 차이를 설명하던 기억이 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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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글쎄요. 4·19세대와 6·3세대는 변혁적 관점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19를 단순한 정치적 변화, 부정부패, 부정선거,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항의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그후 타협하거나 제도권 정치에 통합되어 나가는 양상을 보였지만 4·19를 외세규정하의 억압구조에 대한 모순구조 속에서 이해했던 사람들은 변혁적 입장을 가지고 남아있어요.
60, 70년대에는 통혁당, 1·2차 인민혁명당, 79년도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남민전) 등의 지하당의 전통이 존해한다. 이러한 조직의 조직원 중 몇명은 사형을 당하고 또다른 조직원들은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겪었다. 이들은 그후 80년대까지 징역을 벗어난적이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주요 조직구성원들이 4·19를 전후한 시기에 자신의 정치적 의식을 형성한 층에 속한다는 생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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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같은 경우는 역사에서 거세당한 사람들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같은 4·19세대 중에서도 변혁지향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아 사회활동을 해왔던 경우가 드물고 따라서 그 분들이 직접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는 없었다고 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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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인혁당, 남민전으로 오는 60,70년대 반파쇼민주화투쟁의 전통은 대개 인적 구성상으로도 4.19에서 출발합니다. 4·19는 반파쇼민주화운동의 기폭제로서 그 이전의 변혁전통에 대해서도 영향을 줘 잠자던 것을 깨어 내기도 하고 이전의 사회정치적 현상을 재해석하게 하는 계기도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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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4·19는 분단 이후 형성된 남한사회에서 자라난 세대가 과거의 전통과 결합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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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신영복 선생은 90년대 지점으로까지 연결되는 답변을 한다.
신 :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혁운동도 다양한 입장차이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다양한 인적 구성, 다양한 세대차이를 뛰어넘어서 변혁전통을 통합해내려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젊어 학생운동을 할 때만 해도 늘 선배가 없다는, 생각해보면 오만하달 수도 있는 그런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이어짐을 과소평가하거나 간과하고는 진정한 사회역량의 집결은 불가능하다고 느낍니다.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는 변혁운동 속에서의 4·19세대의 복권선언으로 들렸다. 그 시기를 독재와 폭압의 시기로 규정하는데 동의한다면 가장 철저하게 그에 맞서 투쟁하고자 전의를 불태웠던 4·19세대란 80년대까지 죽거난 감옥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세대다. 아니면 탄압과 감시 속에서 좌절하고 침묵하거나 노예의 언어로 말해야 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신영복 선생만 해도 88년에야 감옥을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4·19세대의 복원이란 용공과 간첩이라는 먼지 쌓인 창고 속에 내팽겨쳐진 우리의 역사, 구체적으로는 그 사람들의 시민권을 역사에서 회생시키는 문제가 될 것이다. 신영복선생의 이야기를 4·19세대의 복권선언으로 해석하고 있을 즈음 그의 이야기는 패배와 승리의 변증법이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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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교도소에 들어가서 일제하, 만주 팔로군, 대구 10·1사건, 구빨치산·신빨치산… 그 분들을 만나면서 단순히 역사로서 이해하던 해방전후의 정치상황을 피가 통하고 살이 통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감동적인 경험이었지요. 그런 힘들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배는 없고 언제나 승리라는 말이 있는 거지요. 혁명세력이 집권하지 못했다고해서 프랑스 혁명은 실패했다고 한다든지, 관군에게 패배했다고 동학혁명은 실패했다고 하는 말이 어리석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이 승리와 패배의 변증법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개인적 성취랄까, 도대체 그 속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는 게 아닐까. 끈질긴 노력 끝에 노조도 생기고 임금도 올라갔지만 해고가 되어 길거리를 전전하게 되었을 때 그 노동자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신 : 우리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개인주의적 사고의 틀, 그리고 기계론적 사고의 틀이 그런 문제를 여유있게 사고하는데 문제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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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론적인 사고란 역사의 발전을 단선적으로, 현상적으로 이겨야만 이기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자신이 반파쇼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한 활동 끝에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감옥에가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속에서 역사는 발전해왔지만 신영복 선생 개인이 겪어야 했던 ‘희생’, 20년의 감옥 생활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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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사실 동기나 우리 연배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지위에서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본다면 내가 만들어낸 것은 없지요. 내가 가지고 있던 외국어까지 잃었으니까(여기서 그가 사건당시 육군사관학교의 교수요원, 즉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하. 그러나 해방전후의 우리 역사를 생생한 현재와 연결된 역사로 복원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큰 것입니다.
신선생은 이 말을 하고 답변을 잠시 멈추었지만, 기자는 그게 20년 인생을 보생해줄 만한 것일까, 기자의 타산적 사고가 지나친 것일까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신 : 60년대였지만 우리도 이론과 원칙상으로는 기층민중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졌습니다. 내 경우에는 그걸 징역 경험으로 대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간교도소에 오니 노인이 많았습니다. 노인들의 경우 사건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요. 일제하에서 만주로 헤매며 살아온 사람들,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일생이 우리 현대사의 작은 골목인데 자연히 한 사건들이 가진 사회성에 눈뜨게 됩니다. 체험적으로 사회를 모순구조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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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목표를 구체화하고 좁게 잡게 되듯이 아마 감옥에서 오랫 동안 지내자면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목표를 고수한다는 생각보다는 더 절박하고 현실성 있는 어떤 토대나 그 무엇을 삶의 목표로 새롭게 재정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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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막연하게 느끼던 걸 정리해주는 느낌인데요. 한 사람에게 진라나 역사에 대한 신뢰가 열악한 생존조건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유지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으면 감기도 걸리고 얼굴빛이 벌써 다릅니다. 그렇더라도 그 속에서 현실적인 토대를 마련하지 않으면 힘들지요. 내 토대는 징역동료들의 체온, 아픔, 기쁨 같은 작은 것들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위로받고 위로해주고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해주며 맺어지는 새로운 인간관계였습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던 인간에 대한 이념을 생활과 통일시키는 구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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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수로 처음에 징역을 살 때는 참 절망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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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그렇지요. 게다가 1심, 2심에서 사형이 확정됐습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있었는데 군사재판에서 3심은 형식적입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가슴에 사형수 표식을 달고 있던 1년 동안 나하고 한방이나 옆방에 있던 사람들이 몇 사람 죽었지요. 그때는 죽는다는 문제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한 게 그만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워낙 현실상황이 그랬으니까요. 우스운 이야긴데 민간교도소라면 캄캄한 실내에서 목매달려 죽는데 육군교도소는 밖에서 총살형을 당하게 되지요. 그게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내가 존경하던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리갈이 필리핀 독립 1년 전에 체포되어 지금 그의 동상이 서있는 필리핀 르네타 공원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앉혀서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면서 필리핀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를 남기고 죽는다는 게 20대의 낭만과 어울리면서 아주 위로가 되더라고요… 하하. 그러다 무기로 감형됐습니다. 낭만은 없어지고 절망만이… 끝도 안보이는 터널을 어떻게 걸아갈 것인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징역살이에서 일관되게 가진 나름의 철학을 만들어내기까지는 5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내가 가진 이론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징역동료들과의 인간관계를 만드는 시기였지요.
기자는「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읽은 한 구절을 떠올렸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 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징역의 열가지 스무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징역은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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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무슨 목표를 가지고 접근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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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인간관계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접근하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감옥의 사람들은 억압의 최하층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자기들을 억압했던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그들과 다르게 구사하는 언어,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정서의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반공논리에 익숙한 그들에게 나는 좌익사범이었습니다. 논리적인 접근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요. 최소한 저 사람들은 사상은 잘못됐지만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평가를 먼저 내리게 되는 거고 그 다음에 그 인간과 그의 사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를 자기들 스스로가 내리게 되는 거지요.
여기서 신영복 선생은 다시 90년대 오늘의 문제로 돌아온다.
신 : 그때 경험으로 돌아보면 현재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이념지향적인 방식이 자칫 교조화되면서 민중적 정서로부터 일정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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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교수의 길을 가던 지식인이었다. 지식과 관념으로 살아가던 사람에게 책과 접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의 공기와도 같은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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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학습을 위해 인간관계도 최소화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에스키모 사회에 간 사람이 얼음에 대해 연구하는 게 자연스럽지 수영을 연구하는 건 안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민중에 다가서려는 경험을 했던 게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이 기간에 자기개조를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인간관계로 언어와 정서가 통하는 품성을 갖기 위해 사실은 많은 책을 안읽었습니다. 또 책이 허용되지않아요. 경전과 사전을 제외한 책은 3권 이상 책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독서하는 습관이 한시간 정도 독서하면 잠시 책을 덮어놓고 읽은 걸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가졌던 독서 습관은 교도소에서 아주 적합했습니다. 하하.
최근 얘기로 넘어오기 전에 이력과 가족관계를 물어보았다. 신영복 선생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적혀 있는 이력은 “밀양에서 남,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숙명여대 강사,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1968년 이른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 무기징역형을 받아 대전·전주교도소에서 20년 20일을 복역함, 1988년 8월 14일 가석방되어 현재 서울에 거주”로 되어 있다. 요즘은 목동에서 살고 있다. 그는 나와서 결혼했다. 지금은 2돌이 지난 아들과 66년에 대학을 입학, 졸업해서 부터 지금까지 방송국 고전음악담당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아내와 함께 아버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형님은 원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을 나와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동생은 연세대를 나와 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자신 때문에 오랫 동안 고생하고 피해를 본 형제들을 의식해서 형제들이 자신과 관련해서 거론되는 일은 아직도 조심스러워한다. 원래 여유있는 집안형편이 아니었던 신영복 선생 아버님의 계획에 의하면 은행원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낸 게 부산상고. 먼저 대학을 간 형님의 뒷바라지도 하고 생계도 해결했어야 하는데 이 둘째아들은 서울대 상대에 입학, 나중에는 대학원을 졸업, 형님과 함께 학문의 길을 걸어갔다. 형님과 신영복 선생은 의논끝에 한 사람이 부산으로 내려가 아버님과 함께 살기로 했다. 내려간 것은 형님이었다. 그는 그런 부채를 지금까지 안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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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사실은 결혼을 안하려고 했어요. 나이도 먹었겠다, 또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을 때의 경험이 있었어요. 고문끝에 기절해 있는데 수사관이 의무실로 전화를 하더군요. 의무과에 약을 갖다놓으라고, 나는 나에게 약을 지어주려고 하나 보다 했지요. 알고 보니 자기 아이들 감기약을 지어놓으라는 거였습니다. 남의 자식에 대한 잔혹함과 자기 가족에 대한 애정이 병존한다는 게 이해가 안갔습니다. 가족이기주의랄까 하는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개해준 분들이 내 사정도 아내의 사정도 잘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 소개받고 한번 만나서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하하. 세상은 자기 뜻대로 사는게 아닌 것 같아요. 자기 변명 같기도 합니다만…. 1시간 책을 읽으면 30분은 사색을 하는 그의 습관은 여기서 또하나의 인생론적인 명제로 정리된다.“인간이란 생명체는 어쩌면 자기변호와 자기비판의 변증법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사람이라면 도대체 그는 누구와 언쟁을 벌일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부부싸움은 안할까?
신 : 한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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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소리가 크게 난 적도 없으신가요?
신 : 없어요. 사실은 나는 감옥에서도 한번도 싸움을 한 적이 없었어요. 대전교도소는 70년대의 강제사상전향공작이 치열하게 전개돼 정치범들이 죽음에 까지 이른 잔혹한 현장이기도 했다. 그는 그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텐데…. 신 : 나는 전향을 일찍 했어요.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그뒤 살인적인 강제전향공작이 벌어지고 강제전향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하면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전향했을 겁니다. 70년대 강제전향공작이 있을 때 전향수와 비전향수는 사동은 달랐습니다만 한 교도소내에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자세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전향은 소내방송을 통해서라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운동장에서 발표를 하게 하는 등의 절차가 있었고 발표가 부실하다고 다시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발표를 하다가 주저앉아 우는 사람도 눈앞에서 목격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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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고통이 크셨겠습니다.
신 : 엄청난 무력감에 괴로웠지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신영복 선생의 사진을 처음 보고 기자는 한참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 얼굴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날카로운 것, 참고 또 참는 얼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무기수 좌익사범이라는 굴레가 만든 한국 지성의 침묵과 인고의 얼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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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든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신영복 선생이 세상에 나온 후 몇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신여복 선생은 어떻게 읽고 있을까?
신 : 현재 20세기를 어떤 논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투쟁을 주요한 축으로 해석합니다. 나는 사회주의의 붕괴에 대해서도 역시 패배와 승리의 변증법이라는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전적인 자본주의도 고전적인 사회주의도 없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말할 만한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본주의도 사회주의의 내용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생존시켜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이제 우리는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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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의 축을 벗어난 세계사적 흐름을 타면서, 또한 동시에 그 대립의 내용을 남북의 분단 문제로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복잡한 현실에 처해 있고 그만큼 어려움이 있는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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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남도 북도 그것이 바람직한 자본주의라거나 바람직한 사회주의체제라고 말할 만한 사회는 아닙니다. 저는 남북의 분단, 한반도가 안고 있는 문제가 세계사적 문제의 집약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문제해결의 방향이 21세기 세계의 진로에 던지는 의미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지요.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옆 벤치. 6시로 향해가는 오후 시간의 바람은 꽃샘추위로 한기를 담고 있었다. 으스스해지는 몸에 세시간 가까운 대화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어찌됐든 일어섰다. 신촌로터리를 향해 나가는 길에서 대화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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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참 진행되고 있는 김영삼 정권의 개혁에 대한 평가가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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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글쎄, 김영삼 정권의 개혁에 대해 경제학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신보수주의 정책으로 평가하기에는 신보수주의 정책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경제적 측면에서 구조개혁을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사실 그동안 민민운동이 주창해온 많은 부분들이 김영삼 정부의 내용에 관철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동안 땀흘려 노력해온 민민세력이 망연자실해하고 패배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패배와 승리의 변증법을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꽃샘추위에 쫓겨 신촌을 향해 교문 밖을 나서며 화제는 요즘 활성화되고 있는 시민운동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신 : 나는 시민운동이 잘못되면 민민운동의 진로를 가로막는 위험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게 아닌가 우려합니다. 김영삼 정부하에서 시민운동의 쟁점들이 많이 흡수되어 나갈 텐데 자칫 시대 흐름상 보수적 운동으로 고착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요. 비유가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의 애국 계몽운동이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시민운동은 기본적으로 민민운동이 열어놓은 공간을 선점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민민운동을 배제하는 상태로 진행되는 것은 바람작하다고 평가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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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현상황은 진보세력의 입장에서 사회적 쟁점을 재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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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이 연루됐던 통혁당은 사실 북한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우리당으로 평가한 남한의 혁명전위정당이다. 그리고 85년 7월 통일혁명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과정에 대해 그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기자는 아직도 냉전논리가 첨예한 한국사회에서 이미 수십년 전에 벌어진 사건의 당사자일 뿐인 신선생을 그런 문제로 자꾸 밀어넣는 게 지금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결국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 : 저쪽에서는 그걸 정통으로 인정해서 남한 내에 벌어지는 모든 변혁운동을 그런 틀로 설명해내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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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이나 한민전 외에 또다른 별도의 정당같은 게 한국사회에 필요할까 하는 논란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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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저쪽에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게 모든 사회운동을 포괄할 수는 없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현실의 사회운동이란 그걸 뛰어넘어 발전하기도 하고 따라서 포괄하기 힘든 법인데…. 그런 논리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자기의 생활의 현실 토대를 갖추는 데 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했다. 그는 이제 또다시 세상에 나와 다시 토대를 갖추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이제 어떤 토대 위에서 세상을 살아갈까? 항상 선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오만한 후배들’은 선배들의 발걸음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신 : 사람들과의 관계가 감옥에서 처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가 힘들더군요. 한때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싶어 모든 정보를 무조건 흡수하려고 했는데 요새는 그걸 반성하고 있습니다.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현실의 토대 속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비슷한 질문을 받아서 “동료나 아는 분들과 잘 상의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할 생각힙니다”라고 했더니 답이 안된다고 느꼈나봐요. 나로서는 많이 생각해서 한 답변인데….
신촌의 한 서점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지하도를 건너 목동으로 가는 정류장에서 신선생과 헤어졌다. 거세된 4·19세대를 우리 곁에 따스한 인간의 목소리로 다가오게 한 신영복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 우리 시대의 문학이나 문화가 정리된다면 적어도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에서 우리는 옥중서한이라는 현대판 유배문학, 유배사상이라는 장르를 새로 만들어야 할 지도 모른다. 20년의 세월이라면 다산 정약용이 유배문학을 만들고 자신의 학문을 총정리할 수 있었을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에서 볼펜 한자루 주어지지 않던 옥중의 상황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신영복 선생의 경우 남긴 것은 옥중서 한 1권이다. 대학강단에 선 신영복. 그는 그외의 어떤 직위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사색은 그의 책이 새로운 장르로 받아들여져야 하듯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할 결과물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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