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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인간성을 향한 불안스럽지만, 확고한‘떨림’
월간‘말’1996년 8월호(글/김경환 기자, 사진/박진희 기자)
언제나 깨어 있는 깊은 사색으로 서늘한 감동을 안겨 주는 우리시대의 참스승 신영복 교수. 그는 90년대를, 다가올 21세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거대한 자본과 그것의 이데올로기인 개인주의, 신세대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승리. 이 엄청난 물결 속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는 그 답을‘인간’에게서 찾고 있다.
「《월간 말》편집자 주」 |
목동 파리공원에서 신영복 교수(55)를 만나던 날, 길고 지루한 장마 중에 반짝 하루,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햇살 부서지는 오전 공원은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인공연못 위를 때이른 잠자리 두 마리가 낮게 날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부신 눈을 들어 잠깐 하늘을 올려다 본 신 교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신동엽 시인은 4월혁명을 잠깐 본 푸른 하늘이라고 했지요.”산들바람이 귓전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그랬다. 보기에 저리 어여쁜 하늘도 인간이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과 한시도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좌절된 혁명의 기억을 두고 네가 본건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이 아니라 시커먼 먹구름이었다고 절규했다. 그리고 시인은,“아침 저녁/네 마음 속 구름 닦고/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볼 수 있는 사람은/외경을/알리라”고 했다. 그때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외경을 보았는가. 그것에 한걸음이라도 다가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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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 실현된 것 만큼의 사상이 자기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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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5월 18일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신새벽, 무등산이었다. 억새밭이 무연히 펼쳐진 들판에 잠시 머물렀다 하산하는 길에 신영복 교수가 어느 젊은 사람과 무등산의 이름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무등은 등급이 없다는 뜻이지요”했다. 그때 일을 떠올리자 신 교수는“다시 무등산에 갔었어요. 지난번 갔을 때는 산 전체를 볼 수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다른 코스로 올라갔지요. 거기서는 전체 모습이 보였어요. 참 좋은 산이었어요.”했다. 그때나,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나 그의 관심은 산이 아니었다. 인간이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리는 돌담을 등지고 나란히 앉았다. 새울음소리가 정적의 공간에 부채살처럼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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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그 시기를 평가하면서‘마르크시즘과 주체사상의 때늦은 등장과 때이른 쇠퇴’라는 손쉬운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는 90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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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을 그런 식으로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청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고 노동하는 형식의 집중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상과 실천을 하나로 보지 않고 어느 한쪽을 떼서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시즘이든 주체사상이든 그것은 다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유효한 분석틀로 수용되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문제의식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회 내부에 그것이 공유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그런 토대가 없는데 외부에서 그냥 사상이 들어와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상이든 그것은 우리 문제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용되고 결합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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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비관적으로 80년대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80년대 실천의 원동력은 열정이었지 사상이 아니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사상을 세운 후에야 실천행동에 나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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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석들을 합니다. 저는 반드시 사상이 정립된 후에 실천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이 움직이고 난 궤적을 나중에 사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지요. 물론 한권의 책에 의해서, 작은 계기에 의해서 일어설 수도 있지만, 개인이 어떤 실천에 나서는 것은 내부에 그만한 온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사상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였다가 쉽게 청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상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정리되고 그 이론이 다음 실천의 지표가 되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사상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언젠가 신 교수는 이렇게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북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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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의 생활신조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이다. 곧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를 갖기는 가을서리처럼 매섭게 하라는 뜻이다. 그의 투명하고 냉철한 의식은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변화도 주목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원칙을 구현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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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변했다는 말을 합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변화를 보고“문화충격이 크다”고 표현하신 일이 있습니다. 90년대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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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내용보다 형식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90년대는 자본의 운동방식과 지배기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민족해방세력과 제국주의세력 사이의 대결구도가 선명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우리시대의 거대한 화두가 되어버린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그 구도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그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굉장한 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가치까지도 이데올로기화해서 광범한 동의구조를 형성해 냈습니다. 개인주의, 신세대문화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자본의 보다 직접적이고 광범한 지배가 문화감성을 포섭해 내는 단계에 와 있는 거지요. 따라서 과거에 우리가 지향했던 도덕적 가치가 2선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화한 현실적 조건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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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하신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주의 사상이 날로 확산되고 그중에서도 특히 미래사회를 대표한다고 하는 신세대들 사이에서 그러한 사상 경향이 확산되고 있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을 공동체적 인간형으로 변화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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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형식이 변화했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 실존의 변혁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풍부한 생산력의 발전과 소비가 가져다 주는 어떤 행복이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가족주의와 같은 생활방식을 승인한다는 것은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사상적 무장해제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집단주의적인 질서와 규율 속에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워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개인주의는 상당히 진보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개인주의는 자본의 순환을 보장해 주는 소비자로서의 개인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순수한 개인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 가치 속에서 아무런 고민없이 계속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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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고전적 주제 중의 하나가 인간의 본성문제라고 봅니다. 역사 속에 여러가지 논쟁이 있어왔지만 사회와 인간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긍정성보다 부정성이 더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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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사람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상대적 존재입니다. 저는 인간의 본성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하려는 태도에 반대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시사회는 농촌공동체 사회였고 노예제사회는 도시적인 사회였어요. 그리고 봉건제사회는 다시 농촌공동체였고 자본주의사회는 도시개인주의 사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보다는 물질에 의해서 가치를 느끼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인간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빈곤, 질병, 무지, 환경오염, 나태 등 이른바 빅5로 불리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제기인 거지요. 90년대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력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낼 수 있다는 신념, 경제발전과 성장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는 신념들이 급속히 무너져내린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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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휴머니즘은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원칙 |
―자본주의가 도저히 풀 수 없는 만성적인 문제, 즉 빈익빈 부익부, 인간성의 파괴, 범죄, 마약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생산력의 발전은 빈곤과 질병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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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빈곤의 문제,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빈곤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려 하는 한 빈곤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무지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를 정보화 사회라고 컴맹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더 많은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빠른 발전속도는 인간을 계속 무지한 상태로 남겨둘 것입니다. 질병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현대의학으로 치유하기 힘든 질병들이 생산과정에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나태의 문제, 폴루션, 범죄, 환경파괴, 3디기피로 상징되는 건전한 노동에 대한 의욕의 상실과 같은 기본적인 인간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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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벌그룹의 광고문구 중에“당신의 경쟁상대는 어느 나라 누구입니까?”를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본시장의 국제화#세계화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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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과잉생산체제입니다. 그것은 이제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를 넘어서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세계화니 WTO니 글로벌라이제이션이니 하는 용어들은 자본의 순환구조를 외곽축에서 보장하기 위한 이론, 문화, 정책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방식으로 자본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자본축적의 순환조건이 굉장히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양적인 면에서의 균형과 질적인 면에서, 특히 사용가치면에서 기적과 같은 균형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한쪽의 파괴와 불균형이 생겨나고 누적되게 됩니다. 해치머니라는 공격적인 투기자본의 등장은 자본의 순환운동의 불완정성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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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버텨오던 한 축인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는 경쟁상대 없는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한 실천의 모색은 무의미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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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자체도 오랜 시간을 두고 변화해 왔습니다. 소위 반봉건에 대한 진보성을 가지고 등장한 초기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1990년대의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달라졌어요. 인류사회에 나타난 어떠한 삶의 방식도, 또 그 삶의 방식을 이론화하는 사상적인 틀도,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상적인 이론체계나 모델을 전제하고 그것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비록 인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입니다. 사회주의적 시도가 실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긍정성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이 있는 한 그 장점은 역사 속에서 계속 남을 것입니다.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합니다. 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내에는 인간을 포괄할 수 있는 실천적 휴머니즘 같은 것이 풍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은 자본주의를 수정해 내고 규제해 내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역사는 미완이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미완에의 도전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것은 진정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지키고 발전시켜 내려는 진지한 실천이다. 신 교수가〈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역사의 뒤안길에서 띄우는 엽서》여섯 번째 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세상의 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땅이 그려져 있지 않다면 지도를 들여다 볼 가치가 없다는 시구가 나의 마음을 감싸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완의 의미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천착해 갈 것인가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 64괘는 미완의 괘인‘미제’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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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소비는 더 많은 행복을 보장해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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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그것이 가진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실패한 사상입니다. 아까‘사회주의적’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여전히 대안으로서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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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가 20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패배했는가를 짚어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생산력 경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생산력주의, 효율성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이노베이션의 요인이 훨씬 적습니다. 그러나 저는 멀쩡한 기계, 기술, 자원을 효율이나 생산력의 입장에서 폐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지속적 성장에 대한 신화도 거의 없어지기는 했지만 성장에 대한 어떤 환상, 이것이 바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유럽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성장을 안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제로성장론이 마음에 듭니다. 더 많은 소비가 더 많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높은 성장이 인류를 더 좋은 사회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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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적 실험의 실패와 자본주의의 승리, 그리고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증대가 현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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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장점과 사회주의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노력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추진되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21세기는 그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좋은 점들이 지양되는 그런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전망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역사가 그렇게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성공과 실패, 반성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듯이 사회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회운동과 자연운동은 인간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대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헤겔이 얘기했듯이 자연운동에서는 플러스 요인이 마이너스 요인보다 우세하면 필연적으로 플러스의 방향으로 변화갑니다. 그러나 사회운동에서는 어떤 요인이든 인간의 실천과 결합되지 않으면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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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북한사회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북한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금기의 영역 중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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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요. 더구나 저는 일반사람보다 더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북한 역시 동구사회주의가 안고 있었던 과제를 상당 부분 안고 있으리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어쩌면 동구사회주의가 처했던 것보다는 더 견고한 포위 속에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중국과 북한, 이 두 나라의 사회주의를 심각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이론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사상까지도 그 거대한 대륙적 소화력으로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은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단적인 대립점에 서 있지만 21세기적 과제와 민족적 과제를 결합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두 개의 제도가 서로 지양되는 형식의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중국 모델보다 훨씬 더 일반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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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천에 대해서 얘기해야겠습니다. 사회가 변화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상응하는 대응논리도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전반의 개방화에 따라 운동이 정치적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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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커다란 가치보다는 당장의 생활상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실천운동에 나섭니다. 특히 개인주의적 사조가 만연해 있는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는 개인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교통문제를 단지 교통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육문제를 단지 학교의 문제로 만 보지 않습니다. 실천투쟁을 통해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사회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강렬하게 추구했던 실천적인 틀이 지금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지금 아마 레닌의 전위당과 같은 강령 규약을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그것을 이행해 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실천방법은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맞게 반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성을 한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원칙을 폐기하는 성급한 청산주의적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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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인간은 도덕적이기만 한가라는 물음을 던진 바 있다. 그는 인간은 도심과 인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도심은 이성이고 인심은 감성이다. 도덕적 인간형의 창출, 이것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거대한 담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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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실패의 가장 큰 교훈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제도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발전시키는 것이 중심이 된다면 정치운동보다는 정신수양운동, 이웃돕기운동, 기타 사회운동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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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21세기에는 인간의 문제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중요하게 제기될 것입니다. 사회는 인간문제를 담는 그릇입니다. 앞으로 인간주의, 인본주의, 도덕적 가치, 이런 테마들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사회체제의 모순구조를 선명히 드러내는 상당히 전투적인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갖는 실천적 의미가 다시 한번 주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화적인 전통은 민중적인 인내천 사상과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사회변혁을 통한 어떤 실천에 무게를 실었던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 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삶의 질의 문제, 지역, 현장과 치열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현장 속에서 인본주의, 인간주의적 과제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실천적 역량을 묶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본주의는 마땅히 현장본위주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정신운동, 도덕재무장운동과 비슷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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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인간의 삶의 질이라는 용어가 세계화와 함께 등장하였습니다. 소득수준이 1만불을 넘어서고 OECD와 G7에 가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삶의 질의 문제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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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의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60년대에는 제도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통한 인간의 구제는 지금에 비해서 상당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와 인간 중 어느 것이 먼저냐. 변증법적 사고나 동양적 사고가 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개의 개념을 따로 떼서 대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곧 사회입니다. 두개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어느 것을 선행시키고 어느 쪽에 더 역점을 두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봅니다. 90년대는 사회변화에 대한 관심이 좀 엷어진 반면 삶의 질, 인간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높아졌습니다. 나는 그런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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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사회운동가이자 뛰어난 서예가, 문필가, 학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선택한다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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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러저러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저는 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전문화에 반대합니다. 생산을 위해서는 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위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종합적인 인간형이 바로 인간의 발전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지향해 내는 문화가 21세기에 고민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획일적 교육보다는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저는 혹시 그속에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들어 있지 않은가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창의성이라면 전문성과는 시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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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사회는 끊임없이 이기심과 경쟁을 유발하며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을 사랑이 넘치는 긍정적인 인간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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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부정적인 인간형을 양산하고 있는데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갖는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사회와 인간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점, 인간주의를 고수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사회적 실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사회적 실천과 인간주의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데도 이것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를 왜소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사상조류들입니다. 그리고 신세대 문화, 이것은 한마디로 패션, 브랜드, 상품의 문화입니다. 이것은 자본의 마케팅 전략과 깊숙히 맞물려 있습니다. 신세대들이 주장하는 아이덴티티, 즉 자기 개성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참 회의적입니다.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고뇌하고, 만들어 내고, 땀흘려서 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써 아이덴티티를 실현할 수 있다는 거대한 환상이 유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노신은“생명의 길은 진보의 길이다. 그것은 언제나 무한한 정신의 삼각형이 비탈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그 어떤 힘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낡은 것이 새 것을 대신할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신 교수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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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20대의 나이에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떤 힘이 교수님을 그런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열정이었습니까 아니면 사상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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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혁명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런 어마어마한 단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저도 곰곰히 생각했어요. 감옥 안에 있으면서 내가 왜 그토록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는가.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결론은 양심문제였어요. 부조리한 사회적 현실을 비켜간다거나 외면함으로써 받게 되는 양심의 가책과 고민이 있었어요.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자기 삶의 행복한 조건이 안된다는 생각에서 나는 그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사회적 실천과 인간의 문제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립불가능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런 양심의 가책은 지금도 받고 있어요. 실천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과제는 있는데 역량이 못미치는데서 양심의 고민이 있어요. 그것이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겠는데 아마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각을 호소합니다. 특히 신세대 문화의 본질에 대한 자각,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자각, 특히 어학공부를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조류에 대한 자각, 자기 발견을 호소합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일은 동시에 인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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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 인간들이 작은 공간에 밀집되어 있는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소한 후 8년동안 거대한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래도 인간을 신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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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저는 여전히 신뢰합니다. 자기를 포기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가끔 애견을 안고 다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진지한 노력도 해 보지도 않고, 겉으로 아주 성급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안고, 그 자리에 대신 애견을 안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착잡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기에 대한 절망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저와 마찬가지 심정일 것입니다. 저는 인간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갖는 존재로 바라보는 태도에 반대합니다. 저는 인간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고 인간으로부터 가장 귀중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양심의 가책을 가장 적게 느낄 수 있는 지점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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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역사의 뒤안길에서 띄우는 엽서》를 읽고 어떤 사람들은 교수님이 치열한 실천에서 멀어지고 관념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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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에서 그것을 느끼는 독자는 안 읽어도 된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독자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어요. 사회적 실천은 내포를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외연을 확대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더 많은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아쉬움을 갖는 독자들은 행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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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형식은 다가오는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내용은 거의 변화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양심의 가책을 가장 적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지점에 계속 서 있고 싶습니다.”
신 교수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연세대 민영규 교수가 쓴《예루살렘 입성기》중에 나오는 말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선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한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때를 일컬어 우리는 그것을 진선진미라 한다. 그는 지남철의 불안한 바늘처럼 진선진미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며 끊임없이 떨고 있다. 그러한 떨림이 있는 한 그는, 우리는, 더 높은 인간성을 향해 한걸음씩, 더디지만 확고하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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