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대상 게시판

청구회추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나무야
더불어숲
강의
변방을 찾아서
처음처럼
이미지 클릭하면 저서를 보실 수 있습니다.

글모음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Extra Form
게재일 1990-04-19
미디어 한겨레신문
[한겨레논단]

젊은 4월


 

3월의 기억은 기미년의 함성이 가슴 설레게 하지만 당시의 수많은 희생의 이야기가 또한 가슴 아프게 한다. 6월의 기억은 6월항쟁의 환희도 어느새 사위어 식어버리고 6·25의 쓰라린 상처만이 작은 기쁨마저 허락하지 않는 채 지금껏 수많은 혈육들의 가슴을 저미고 있다.

 

3월과 6월 사이, 4월과 5월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기억으로 남으려 하는가. 5월은 광주의 승리와 패배가 지금도 뜨겁게 몸부림치고 있으며, 진달래와 라일락의 4월은 올해도 30년 전의 그 화사한 꽃향기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다. 4·19는 총구가 낮아서 모자만 뚫고 지나간 '미완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든, 주소를 잘못 적어 '분실된 의거'였기 때문이든, 지금은 날선 비판과 초라한 기념비가 이야기하듯이 4월이 봄비 속의 꽃처럼 스산한 계절로 왔다가 가고 있다.

 

"4·19는 짧고 5·16은 길다."

 

1960년 4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의 짧았던 1년에 비하여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30년 군사정권은 과연 한 세대가 바뀌는 긴 세월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스무남은살의 학생으로 그 4월을 맞이하였으며, 그리고 그 후 30년을 참으로 힘든 곳에서 흩어져 살았다. 낮은 수준의 정서적 민족주의와 소박한 민주주의를 소망할 뿐이던 스무남은살의 학생들이 4월의 환희와 좌절을 차례로 겪어가는 동안 서서히 사회와 민족의 진상을 깨달아가게 되었다면,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그 깨달음을 짐지고 걸어가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4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더구나 4월의 각성과 신뢰가 심지어는 감옥과 양심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면 우리의 4월은 실로 잔인하리만큼 엄청난 계절이 아닐 수 없다.

 

4·19가 그 이념과 주체에 있어서 명백한 한계를 갖는 미완의 혁명이었음은 아무도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4월이 설령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든 그것은 거리로 달려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것이며 그들의 정직한 모습 그 자체였다.

 

형들의 책가방을 챙겨든 국민학생이 있는가 하면 총총히 유서를 남기고 뛰어나가 총탄에 쓰러진 중학교 여학생이 있었으며 젊은이들의 대열 속에 유독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통탄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 회사원, 실업자, 간호원, 이발사, 요리사에 이르기까지
4·19는 거대한 공감의 토대 위에 이룩된 진실이었다.

 

4월이 이룩해낸 이 정서적 공감은 실의와 좌절로 움츠린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숨은 역량을 자각케 하였다는 점에서 이미 빛나는 승리이며 닫힌 가슴 열어주는 드높은 하늘이었다. 이것은 이성적 논리로는 감히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역동성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과제로 남아 유연한 예술성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4월은 급속히 발전해가고 있던 항쟁이었다. 반독재 민주항쟁에서 자주와 통일이라는 민족의 과제를 겨냥하여 스스로 혁명적 내용과 진통을 벼려내고 있었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이러한 선언은 분단의 억압과 예속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조국의 진상에 맞세우는 것이었다. 8·15의 해방공간에 넘치던 감격이 질식당하고 6·25의 참화가 그나마의 남은 역량을 초토화해버린 황량한 들녘에 4·19는 유산된 민족·민주운동을 계승하는 새봄의 진달래꽃이었다.

 

혁명은 계승됨으로써만 완성되는 것이며 역사는 새로이 써짐으로써만 실천적 뜻을 얻는 것이다. "누가 프랑스혁명을 실패했다고 하는가"라고 반문하던 앙드레 말로의 분노를 빌리지 않더라도 민중투쟁은 당장의 승패에 상관없이 언제나 승리이다. 그 진상을 자각하고 그 역량을 신뢰하는 사람은 긴 겨울 밤 그 환희의 이야기를 전하고 새봄에 열릴 푸른 하늘을 그려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4월'을 이어갈 수많은 새로운 4월을 가지고 있다.

 

'4월은 길고' '4월은 젊다.'

 

비단 4월뿐만 아니라 수많은 5월, 수많은 6월, 그리고 수많은 7월, 8월을 가지고 있으며 4월에서 5월로, 그리고 7월로, 8월로 이어갈 수많은 계절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역사, 도도한 기쁨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젊은 계절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0. 4. 19.

List of Articles
분류 제목 게재일 미디어
기고 "하나되라" 저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 한겨레신문 창간네돌 특집 1992.5.15 1992-05-15 한겨레신문
기고 수도꼭지의 경제학-월간 경제정의 1991년 7,8월호(창간호) 1991-07-01 월간 경제정의
기고 사람의 얼굴-계간지 사회평론 창간기념 1991년 5월 1991-05-01 계간지 사회평론
기고 자전 에세이 / 나의 길-동아일보 1990.12.2. 1990-12-02 동아일보
기고 법-한겨레신문 1990.5.17. 1990-05-17 한겨레신문
기고 인간적인 사람 인간적인 사회-한겨레신문 1990.5.3. 1990-05-03 한겨레신문
기고 젊은 4월 - 한겨레신문 1990.4.19. 1990-04-19 한겨레신문
기고 죽순의 시작 - 한겨레신문 1990.4.6. 1990-04-06 한겨레신문
기고 따뜻한 토큰과 보이지 않는 손 - 한겨레신문 1990.3.23. 1990-03-23 한겨레신문
기고 산천의 봄 세상의 봄 - 한겨레신문 1990.3.8. 1990-03-08 한겨레신문
Board Pagination ‹ Prev 1 ...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Next ›
/ 40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