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움직여서 먹고 사는 사람은 대체로 쓰임새가 헤픈 반면에 돈을 움직여서 먹고 사는 사람은 쓰임새가 여물다고 한다. 그러나 몸 움직여 버는 돈이란 그저 먹고 사는 데서 이쪽저쪽일 뿐 따로 쌓아둘 나머지가 있을 리 없다. 쓰임새가 헤프다는 것은 다만 그 씀씀이가 쉽다는 뜻에 불과하다. 쓰임새가 쉬운 까닭도 내가 겪어본 바로는 첫째 자신의 노동력을 믿기 때문이다. 쓰더라도 축난다는 생각이 없다. 또 벌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끈끈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하는 과정에서 매은 인간관계가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함께 써야 할 사람들이 주위에 많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하고 더불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을 움직여 먹고 사는 사람의 쓰임새가 헤프다는 것은 이를테면 구두가 발보다 조금 크다는 정도의 필요 그 자체일 뿐 결코 인격적인 결함이라 할 수 는 없다. 스스로의 역량을 신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품성이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내용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이른바‘번다’는 말의 뜻이 애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힘들여 일한 대가로 돈을 받을 경우에도 돈을 벌었다고 하고, 돈놀이나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의 경우에도 돈을 벌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남을 속이거나 빼앗은 경우도 돈을 벌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도대체‘번다’는 말의 본뜻은 무엇인가. 경제학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이 버는 모든 소득은 노임이든 이자든 이윰이든 불로소득이든, 오로지 생산된 가치물에서 나누어 받는 것이다. 가치물을 생산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타인의 소득을 자기의 소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번다’는 말은 가치를 생산함으로써 받는 돈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의‘번다’고 하는 단어는 다른 말로 바꾸어야 마땅하다.
시골에 사는 허 서방이 서울에 올라와서 양복점에서 일하는 둘째아들한테서 양복 한벌을 해 입었다.
“얘, 이 옷이 얼마냐?”
“20만원입니다. 10만원은 옷감값이고 10만원은 품값이지요.”
허서방은 방직공장에 다니는 큰 딸을 찾아갔다.
“얘, 양복 한벌 감이 얼마냐?”
“10만원입니다. 5만원은 실값이고 5만원은 품값이지요.”
허 서방은 이번에는 방적공장에 다니는 작은딸을 찾아 갔다.
“얘, 양복 한벌 감에 드는 실값이 얼마냐?”
“5만원입니다. 2만원은 양모값이고 3만원은 품값이지요.”
허 서방은 도로 시골로 내려가서 양을 키우는 큰 아들한테 물었다.
“얘, 양복 한벌감에 드는 양모값이 얼마냐?”
“2만원입니다. 만원은 양값이고 만원은 품값이지요.”
양은 양이 낳고 양값이란 양을 기르는 품값이다.
허 서방이 입은 20만원의 양복은 결국 4남매의 품값이다.
이 이야기는 양복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양육하고 지탱하는 의식주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준다. 5월1일 노동절을 전후하여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의 주장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법과 경제’의 이름으로 이를 강력하게 다스리고 있다. 노동현장뿐만 아니라 토지·주택·학교·언론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 일상화되어 있는 증오와 불신과 집단적 냉소가 우리 모두의 창의와 의욕을 한없이 천대하고 있다. 국민의 불과 0.2%가 한햇동안 80조여원의 불로소득을‘벌고’있으며, 한편에서는 그 빈궁과 억압이 사람을 소외시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잉여와 방종이 사람을 부단히 타락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자본의 부당한 축적과정을 그대로 둔 채 이 집단적 불신과 냉소를 국민적 공감으로 합의해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의 진보는 경제적 부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맺고 있는‘관계’의 실상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만들고 함께 나누는 삶의 창출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회를 키우는 것이라면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민주 노동운동의 목표와 이상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진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은 철저한 소비자일 뿐이며 미생물은 단지 보조자임에 비하여 지구 위의 유일한 생산자는 오직 식물이라는 한 농사꾼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정치경제학이다. 나무를 키우는 일이 자연을 지키는 일이듯이 사회의 생산자를 신뢰하며 그를 건강하고 힘있게 키우는 일이야말로 사회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소외와 타락을 동시에 구제하는 유일한 길이라 할 것이다.
한겨레신문 199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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