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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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진보평론 |
강물과 시간1. 새로운 미래
1999년을 보내고 200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시간대(時間帶)를 대면하고 있다.
새 천년의 일출을 기리는 화려한 철야를 맞이하기도 하고 새 세기의 벽두에 서는 감동에 가슴 설레기도 하고 또 한편 변함없는 하루하루를 답습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과거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바라보기도 한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그러나 이 경우 자칫 망각하기 쉬운 것이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지점(地點)과 시점(時點)이다. 그러나 천년 단위의 긴 시간대를 대면하는 경우 천년과 대비된 현재의 지점과 시점이 무척 왜소하게 느껴진다. 더구나 그 천년이 엄청난 변화와 새로움으로 가득 찬 것일 때 우리는 서둘러 현재라는 실천적 지반을 방기하게 된다.
흔히 시간이란 유수(流水)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유수처럼 흘러가는, 그야말로 물과 같다는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시간을 객관적 실재(實在)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존재형식일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의 나이를 모른다. 200살이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300살이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자기에게도 실감 없는 숫자를 댄다. 변화 없는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이 있을 리 없다. 나이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마저도 변화가 아니라 반복이다. 아프리카의 오지에 1년을 365개의 숫자로 나눈 캘린더는 없다.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시간은 미래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는 생각이다.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치 다른 곳에서 지은 집을 이곳으로 옮겨오거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해야 한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 천년 담론의 와중에서 나는 시간의 실재성과 방향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몇가지 오류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우선 대부분의 새 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 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 낸다. 이러한 미래담론의 기본구도는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도착된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현재와 미래라는 두 계기로 구분한다. 그러나 '미래'라는 계기는 현재의 변화를 선취(先取)한 편의적 모사(模寫)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미래담론이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그 원초적 관념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담론에 있어서 현재와 미래라는 2계기는 연관적 통일체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2계기간의 연관이 사상된 2개의 독립 항으로 구성되고 있다. 미래담론의 이러한 2항 대립구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변증법의 구조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대립의 1측면인 미래는 어디까지나 현재(A)로부터 추출되는 것(非A)이라는 점이 우선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하나의 통일체를 2계기(A와 非A)로 인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운동을 사유의 내부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을 잃지 않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중적이다.
먼저 현재와 통일된 계기로서의 미래라는 개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유과정에서 재구성된 관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고, 다음으로 미래를 현재로부터 이끌어내는 일이다.
우리의 인식과정이 사유의 재구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면 하나의 통일체를 두 계기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 읽기는 단계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으며 대립의 한 측면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대립의 한 측면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느 측면에서 출발하여야 하는가가 문제의 중심이 된다. 현재와 미래라는 2측면 중에서 당연히 현재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실재성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의 내용을 이루는 실재의 운동이 그러한 과정을 경과하기 때문이다. 현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곧 운동의 원인을 내부에서 구하는 태도이다.
"새로운 미래"라는 관념은 현재(A)를 왜소하게 만들고 우회하게 만든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래(非A)를 현재와 다른 어떤 것(B, C, D 등)으로 대치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사회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오류의 근거가 된다.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유보하거나 우회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밀레니엄 담론에 있어서 21세기는 새로운 것(B, C, D )이다. 주어진 조건이며 타자(他者)로서 우리와 맞선다. 그리고 그것이 거꾸로 현실(A)인식의 규정적 관점(觀點)이 되고 구속력을 행사한다 . 국제금융자본의 축적운동은 바깥으로부터 오는 타자이며 주어진 조건으로 승인된다. 자본의 운동형식인 정보화와 세계화라는 공간개념이 시간개념의 실재성을 강화하도록 작용한다. 이러한 일련의 체계는 미래담론의 필연적 귀결이다.
국제금융자본과 정보화, 세계화의 규정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非A이며 C, D, E . . .가 아니다. 그리고 非A역시 재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유의되어야 한다.
몇몇 뛰어난 논의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대외부문의 규정력을 읽는 방법도 우리의 정치 경제적 구조가 비자립적이라는 현실(A)에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사회변화를 실천적 관점에서 읽는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는 현재에서, 원인은 내부에서' 찾는 방법론에 있어서의 논리성이다. 현실은 결코 왜소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복잡한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것은 그만큼 결별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진정한 결별은 내성(內性) 안에서 그리고 내성의 거부로서 행해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가 되고 현재의 거부이후에 미래의 계기가 발견되는 것이다. 미래는 그 자리를 비워두어야 한다.
2. 현재의 내부
'현재(現在)'와 '내부(內部)'는 그런 점에서 모든 논의의 전제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새로운 독해(讀解)가 요구되는 것으로 민주담론을 예로 들 수 있다.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정부라고 명명함으로써 문민정부이래 시작된 민주담론이 국민정부에 와서 일단 완성되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적어도 담론이라는 형식논리에 있어서 일단락 된다. 문제는 이러한 담론의 완성이 무엇으로 이어지는가에 있다. 이것은 시민운동과 감시(監視)기능, 의회전술과 합법정당을 비롯하여 운동의 중심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며 당연히 무엇을 우회하고 무엇을 부추길 것인 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민주담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한마디로 보수연합구도의 이론적 산물이다. 현실적으로 국민정부가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것도 연합정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의 이론적 분식(粉飾)이다. 나아가 야당을 포함한 보수정치권 전반의 연합구도가 일단락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것은 자유당 정권과 군사정권으로부터 배제되었던 보수정치세력이 일단 민주적인 구도로 지배권역을 분점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민주담론의 완성은 이러한 보수 지배권역 내부의 협소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논의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주담론이 연합정권의 의제(擬制)된 좌우연합을 포괄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당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널리 입증된 바와 같이 이러한 연합구도가 지향하는 바는 안으로는 내각제라는 권력형식을 공론화하고 밖으로는 자본과 노동에 대한 개혁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에 있어서는 국난극복을 위한 국민적 동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에 대한 개혁은 보수연합정권의 대외적 안정구조를, 노동에 대한 개혁은 대내적 안정구조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그 기본적 성격이다. 내각제는 지배권력내의 민주주의가 가장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체제임은 물론이다. 결국 민주담론의 완성은 보수연합의 일단락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출현을 '민주주의의 종말'로 추인하는 논의이다. 배타적 독재정권 기간동안의 민주화 담론은, 비록 민중진영이 일정하게 주변보수그룹과 연대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 기간의 비민주성 규탄은 사회의 전반적 민주적 구조를 결여한 데에 있지 않았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민주화 담론은 기본적으로 보수계층내의 민주주의 논의였다. 6월 항쟁을 계기로 보수연합의 출현과 함께 민중진영이 소외되는 과정에서 이는 사후적으로 입증된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민주담론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다수의견의 수렴방식이라는 형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민주주의를 계급내부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제하의 자치론(외교독립론을 포함한)과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 역시 그 협애한 영역 내에서의 논의였다. 조선조 후기에 나타난 개화(開化)와 척사(斥邪)의 대립이나 조선조 전기간을 일관한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역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재상제도와 절대군주제라는 권력형식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숙종 연간의 준론탕평(峻論蕩平)처럼 환국(換局)형식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영조 연간의 완론탕평(緩論蕩平)처럼 각 당파의 연합형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상적으로도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이 훈구와 사림, 재상제도와 절대군주제와 결합되어 화려한 담론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地主)-전호(佃戶)의 대립이라는 기본모순이 배제된 지배계층내의 편협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은 물론이다. 조선조 사회의 기본모순은 지주-전호관계를 축으로 하는 봉건사회의 그것임은 물론이다. 경제적으로 지주이며 정치적으로 관리이며 사회적으로 양반이며 문화적으로 독서계층인 지배계급과, 경제적으로 노동자이며 정치적으로 피지배자이며 사회적으로 상민이며 문화적으로 소외계층인 전호농민이 이루어내는 대립과 통일이 그 사회의 실상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을 구태여 거론하는 까닭은 현재의 사회정치적 구조에 완고하게 점철되어 있는 과거의 누적 때문이다. 현재의 성격을 선취된 미래개념으로 대치하는 대신에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에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에는 해방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간이 '분단시대(分斷時代)'로 기록될 것이다. 조선시대, 식민지시대에 이어서 분단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IMF관리 국면, 그리고 21세기 담론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이 도치되어 있다.
차라리 강물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변화 읽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본적 관점을 견지하게 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시간은 영원한 현재가 함께 흘러가는 현재의 변화 그 자체이다. 지주, 전호, 훈구, 사림, 재상제도, 절대왕정, 개화, 척사, 독립론, 자치론 등 우리역사의 모든 과거가 그 형태만을 달리하여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이다.
시간은 영원한 현재가 함께 흘러가는 현재사(現在史)를 자기의 내용으로 갖는다. 더구나 역사는 강물의 속도로 강물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란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성이 필요하다. 미래는 결코 선취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 미래의 선취방식일 뿐이다. 미래담론의 문제점은 현재와 미래의 엄청난 비대칭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타자인 미래를 주체화하고 주체인 현재를 타자화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와 주체를 타자화하는 시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인식의 총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단 미래담론뿐만 아니라 진보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진보담론의 역사는 타자를 주체화하고 추종과 시행착오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소위 근대기획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이 사실이다. 근대화의 내용은 자본주의화였으며 형식에 있어서 세계화과정이었다. 오늘의 미래담론, 세계화담론은 본질에 있어서 근현대를 일관한 근대기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연암(燕巖)은 동일한 질(質)내의 보다 좋은 상태를 발전이라고 규정한다. 모순의 두 축이 그 균형을 이룬 상태를 발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균형과 통일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역사의 보편적 발전구도는 오랜 불균형상태와 일시적인 균형상태의 교직이다. 이것이 사회변화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발전과 진보의 개념은 과정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취된 이상적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과정도 아니다. 새 천년의 미래담론이 지배적 담론으로 세력화하고, 민주담론이 일단 종결되는 현금의 사정은 더욱이나 균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과정의 어떤 시점(時點)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1개의 시점을 극대화하는 정태론적 관점이며 우회와 은폐의 전술일 뿐이다. 현실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3. 떨리는 지남철
이러한 담론 환경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우민화(愚民化)이다. 모든 우민화는 가장 먼저 '통합(統合)'이라는 형식논리로서 포장된다. 형식에 있어서 소위 민주적 외피를 입는다. 그 민주적 외피 때문에 통합은 역대의 모든 집권세력으로 하여금 지배구조를 안정화하는 효과적인 통제기제로 선호하게 한다. 이러한 통제기제와 방식은 오래된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역대왕조가 가장 먼저 착수하는 것이 민중의 우민화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우민화와 탈 정치화라는 통제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하의 우민화는 그 방식이 문화적 기제를 빌림으로써 마치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수용된다. 그리고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상품화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그 영역이 광범하다. 사회의 문화적 구조에서부터 개인의 정서와 생활리듬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이성이 감성으로 대체되고 이데올로기적 통제기제가 문화적 포섭기제로 대체됨으로써 그것의 재생산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IMF상황에 대한 국민주의적 대응, 세대교체론, 낙천 낙선 시민운동 등 최근의 현안들이 과연 무엇을 우회하고 있으며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일이다. 그것이 갖는 부분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변혁을 주변화 하거나 유보, 우회하는 정치적 우민화에 기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 매매춘 단속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이 어떤 점에서 매우 상징적 성격을 보여준다. 미성년자 매매춘이 매매춘 그 자체를 대속(代贖)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교육현장의 붕괴현상도 마찬가지이다. 학교가 기존이데올로기의 재생산 현장으로 전락됨으로써 우민화의 현장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다양성 교육, 열린교육, 팔리는 교육, 산학협동이라는 우리시대의 교육적 가치에는 미래담론의 허구성과 나란히 우민적 프로그램이 숨어 있다. 현안이 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단적으로 그것을 예시한다. 교육은 교육서비스의 생산과 소비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신 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은 일견 민주적 구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품논리이며 시장논리이다. 상품논리와 시장논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격이 거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육에 있어서 인간의 문제가 제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스승과 같은 인격적 개념이 설 곳이 없다. 이것은 교육을 인간과는 무관한 하나의 물질적 대상 즉 상품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명제는 일견 매우 인간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라는 관점이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의 상품생산노동이 인간적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냉혹한 물량적 계량지표에 의하여 측정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더구나 세계화과정에 있어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의 교육이 그 질(質)에 있어서나 양(量)에 있어서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을 상품화와 세계화는 극명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강요한다. 인간적 관점이나 우리사회의 주체적 가치는 설자리가 없다. '무너지는 교실'은 필연적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근본적 비판의식은 장송되고, 사회변화는 이미지의 변화로 대체된다. 그리고 사이버공간에 유폐된다. 최근 보수대연합의 출현과 민주담론의 일단락이후 급속하게 나타나는 교실의 붕괴현상에는 바로 그 정치적 장치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의 극복은 극히 개인적 경쟁으로 추구되고, 경쟁은 합리적이라는 또 하나의 민주적 형식으로 포장된다. 개인적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개성의 다양성이라는 영역으로 도피하거나, 감성 그 자체에 매몰되거나 소비문화에 탐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시장이 출현한다.
이러한 문화적 지형은 지배구조의 토대가 안정적인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된 현상이다. 서구사회의 경우 20대 80의 구조는 지배블럭인 20이 그 안정성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80과의 거리를 추월이 불가능한 선까지 질주하고 있다. 소위 난자(卵子), 정자(精子)은행에 의한 신 인종의 실험이 그것의 한 예이다. 이러한 실험은 인공 유전자조작에 의하여, 지배계급이 아닌 새로운 지배인종을 만들어냄으로써 영원히 안정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우민화의 극치이다. 현재로서는 그러한 유전자조작이 불임자들에 대한 치료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난자정자은행이 왜 하버드 대학구내에 설립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이러한 20의 탈출이 신상품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자본의 거대한 힘과 결합되어 진행된다는 점에서 평화적 이행과정을 밟는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체제만큼 고도의 우민화가 광범하게 진행된 체제는 없다. 고대노예제사회의 물리학에서 중세신분사회의 사회학, 근대이후의 경제학 그리고 바야흐로 생명공학이라는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머지않아 사회변혁은 사회경제학에서 생명공학의 장으로 이동될 지도 모른다.
농민항쟁이 치열하게 조직되고 있는 동안에 조선조의 붕당정치는 그 민주적 지배담론을 완성하지 못한다. 일제하의 지배구조는 독립항쟁의 대립측면이 대치하는 동안에는 그 지배구조를 완성하지 못한다. 자유당정권과 군사정권은 그 협소한 비민주적 성격이 도전 받는 동안에는 민주담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물리적인 탄압이외의 통제기제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서 2가지 결론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민주담론이 완결되지 못한 단계는 우민화의 조건이 미성숙하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러한 단계에서는 지배계층의 소외블럭이 피지배계층과 일정하게 연합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진행된다. 이것은 식민지의 지배계층이 식민지의 피지배계층에게 호소하고 연합하는 식민지 민족운동의 제1단계와 그 형식에 있어서 같다. 이 경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단계에서는 민주담론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반면 민중에 대한 우민화의 필요성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수연합의 정치지형이 형성되고 소외블럭이 권력지분에 참여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은 종결되는 것이지만 그 동안에는 민주담론이 사회적 논의에서 소멸되지 않으며 우민화가 착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일련의 비판적 작업이 당면의 과제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적 영역을 만들어 내고 나아가 그것을 전선(戰線)으로 확장해 가는 작업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사회의 비판의식의 치열함이 잠자는 경우 그것은 곧 우민화에 열중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며 우민화는 다시 모든 비판적 가치를 장송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비판성은 사후(事後)에 구성된 허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사전(事前)에 구성된 허구에 대하여도 비판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비판적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민주담론을 진정한 민주적 위상에 다시 정착시키는 일이다. 미래에 대하여, 민주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진보에 대하여 더욱 서슬 푸른 의식을 키워나가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자세일 것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평론 제3호 (2000년 봄호) |
분류 | 제목 | 게재일 | 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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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아름다운 패배 - 중앙일보 새해특집 2001.1.4. | 2001-01-04 | 중앙일보 |
기고 | 아픔을 나누는 삶 - 월간 복지동향 권두칼럼 2000년 9월 | 2000-09-01 | 월간 복지동향 |
기고 | 내 기억 속의 기차이야기 - 레일로드 2000년 9월 | 2000-09-01 | 레일로드 |
기고 | 나눔, 그 아름다운 삶 - 동아일보 2000.5.4. | 2000-05-04 | 동아일보 |
기고 | 아름다운 얼굴을 위하여 - 중앙일보 2000.3.30. | 2000-03-30 | 중앙일보 |
기고 | 강물과 시간 - 진보평론 제3호(2000년 봄호) | 2000-03-01 | 진보평론 |
기고 | 희망의 언어 碩果不食 -‘NEWS+’1998.9.24 | 1998-09-24 | NEWS+ |
기고 | 어려움은 즐거움보다 함께 하기 쉽습니다 - 중앙일보 1998.1.23. | 1998-01-23 | 중앙일보 |
기고 | 유항산(有恒産) 무항심(無恒心)- 신동아 권두수필 1996년 11월호 | 1996-11-01 | 신동아 |
기고 | 통일 그 바램에서 현실로 - 1995 경실련 총서 5 | 1995-01-01 | 경실련 총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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