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 2001-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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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 이후 |
- <나무가 나무에게> 발문 -
1996년 스승의 날 선물로 「홈페이지」를 받았다. 받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받은 것은 없었다. 실감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교도소에서 선물로 받는 양말은 먼저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뜨개질에 담긴 수고도 짐작이 간다. 홈페이지는 피부에 와 닿는 물건이 아니었다. 처음 선을 보인 홈페이지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본문을 모두 올리고 서예전에 출품했던 글씨도 올려놓았다. 나로서는 그것에 담긴 수고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또 하나 곤혹스러웠던 것은 홈페이지의 초기화면이었다. 옥방에 꽃을 놓은 그림이었다. 비록 창문으로부터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나 대신 빨간 꽃이 놓여 있기는 하지만 홈페이지 초기화면을 옥방으로 하다니. 나는 그 그림을 보면서 아직도 내가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게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감옥 속에 넣어두고 바라본다. 나 역시 꿈에 자주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고 또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아직도 그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곳은 결별할 수 없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감옥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홈페이지 역시 내게는 감옥으로 다가왔다. 홈페이지를 찾는 사람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속에 있는 나의 이미지를 읽으려 하였다. 올라오는 글들도 그랬다. 매우 사색적인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전체의 기조도 많이 달라졌다. 사색적인 글들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그러한 관조와 성찰이 조로(早老)와 위선(僞善)이 아니냐는 질타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자신의 삶을 서슴지 않고 보여주고 자신의 아픔까지 정직하게 드러내는 글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홈페이지 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곳은 여전히 내게는 불편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없는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은 경직된 공간이었다. 사실 책 속에 있는 것은 진솔한 내가 아니다. 감옥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원시적 공간이다. 위선(僞善)과 위악(僞惡), 폭력(暴力)과 충동(衝動)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잠시도 그냥 두지 않는 곳이다. 무슨 능력이든 어떤 수단이든 송두리째 동원하지 않으면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불안한 공간이다. 적어도 "조용한 사색의 공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편지에는 물론 사색적인 생각들을 많이 담았다. 내가 그러한 생각을 담기 시작한 것은 기록해두지 않으면 강물처럼 흘러갈 상념들이 아까워서였다. 그 상념들이 아까웠다기보다 그러한 상념을 길어 올린 그 세월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유일하게 기록이 허용된 엽서에 적어서 집으로 보내 두었다. 언젠가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면 잃어버린 세월을 생환(生還)할 수 있으리라는 가난한 소망을 그 글들이 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의 편지글들은 감옥의 진상을 담고 있지 않다. 적나라한 진상을 에돌아가는 우회였다. 나는 지금도 어쩌다 그 글들을 읽을 때 행간에 묻힌 그 시절의 참담함에 놀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을 견디기 위한 나의 긴장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들의 아픔을 덜어보려는 나의 노력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검열을 받는 글이었다. 나로서는 무너진 모습을 권력에게 보이기 싫었다. 가능한 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만들어가야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필요하였고 가족에게도 필요한 자세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였던가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책제목을 내가 붙인다면 "다시 쓰고 싶은 편지"로 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다.
나는 또다시 그러한 무대에 올라가 경직된 자세로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긴장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책 속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비단 홈페이지와 관련된 고민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문득 문득 부딪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홈페이지를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내가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짧은 새해인사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글을 올리지 않았고 올라오는 글들만 가끔씩 읽었다. 나를 찾는 사람도 있었고 내게 직접 던지는 질문도 있었지만 나는 읽기만 했다. 급한 질문도 있었고 끈질긴 질문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민에 대한 답변은 결국 자기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찾은 답변만큼만 자기가 해결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해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로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며 결국 해답이 안 된다. 다행히 홈페이지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어느덧 애정과 역량을 함께 쌓아놓았다. 뿐만 아니라 논의의 수준도 매우 높고 진지하였다. 나로서도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준에 못 미칠 것 같아서 글을 올리기가 더 어려워졌지만 고맙고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 빈 공간으로 남아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글들의 일부가 책에 실려서 홈페이지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이버공간이 세상에 접속되는 셈이다. 책으로 출판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여러 사람이 걱정하였음을 알고 있다. 사사로운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세상의 넓은 공간에 나오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걱정이었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홈페이지 속의 담론들이 어떤 의미로 읽혀질지 두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책의 출판이 갖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홈페이지 「더불어숲」이 동시대의 고민을 얼마만큼 담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담겨 있는 우리시대의 양(量)을 측정해 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은 앞으로 우리의 생각을 키워가고 홈페이지의 지평을 넓혀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출판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사이버공간과 현실공간이 통일되기를 기대한다. 홈페이지는 현실공간에서의 만남을 준비하고 현실공간에서의 만남은 다시 홈페이지에 애정을 불어넣음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이론과 실천이,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과학도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의 품성이 바로 '철학적 추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이다. 이 두 품성이 고루 조화되어 있지 않는 한 올바른 인식도 올바른 실천도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신뢰에 인색하다. 그것이 가상(假想)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가상으로 말한다면 과학이나 모든 이론도 추상(抽象)이며 가상(假象)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책도 그렇다. 우리의 삶도 따지고 보면 사이버공간에 지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발달한다는 것은 이러한 가상공간의 외연이 깨어지고 그 내포가 재구성(再構成)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책 속의 논(論)과 어(語), 책 속의 사람은 결국 현실과 실물에 의하여 검증된 이후에야 책으로 남을 뿐이다. 우리의 삶은 내게 관계 있는 것만으로 구성된 공간이며 내가 아는 것만으로 구성된 가상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도 우리가 만들어 놓고 있는 협소한 삶의 가상공간을 부단히 깨트리고 성찰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상공간이란 껍질을 벗음으로써 비로소 신뢰받을 수 있는 '미완(未完)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홈페이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홈페이지가 확장된다는 것은 접속빈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홈페이지 자체를 현실과 접속시키는 일이며 인간적 만남으로 채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사이버강의와 영상매체를 통한 강의방식이 권장되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방식을 일정하게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일 없이, 몸소 참여하여 부딪치는 일 없이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눈빛을 마주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나는 신뢰하지 못한다. 만남이 없는 감동이 있을 수 없고 감동이 없는 이해도 또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교실공간 역시 최소한의 만남밖에 허용하지 않는 창백한 공간이며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또한 관념적인 것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교실공간에는 눈빛의 만남이 있고 감동의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먼저 어떤 주제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주변을 답보하고 시선만 주고받으며 몸살하다가 이윽고 한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교실전체가 동시에 상승(上昇)하는 경험을 갖게 되는 순간이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교수와 학생이 함께 이루어내는 짧지만 감동적인 순간이 있다. 그런 감동의 순간이 있음으로 해서 교실은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 배운다는 것은 생각을 높여나가는 일이다. 높여나가는 '경험'을 쌓아 가는 일이다. 그러한 경험들로서 삶의 풋풋한 실체를 키워 가는 일이다. 초고속 네트워크가 발휘하는 속도와 넓이의 엄청난 위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手段)'이며 '준비(準備)'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진정한 만남을 위한 것이며, 뜨거운 공감을 위한 것이며 진정한 이해(理解)에 이르기 위한 작은 약속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읽기반, 느티나무, 소리어리 등 그동안 「더불어숲」의 여러 소모임들이 만들어지는 까닭도 아마 가상공간의 갈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소풍가는 날"이나 "새내기 모임" "운동회" 등은 그 창백한 논(論)과 어(語)의 공간을 사람들의 인정으로 채우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미완(未完)의 장(場)을 완성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연말의 전체모임 때 느낀 점이다. 참으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감동이 있었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비바람을 견디고 있던 나무들이 한 곳에 모였을 뿐인데도 더불어 숲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우리가 속하고 있는 집단은 그것이 가족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대체로 우연한 집단이다. 그래서 같은 집단에 속하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이란 그렇게 함께 지내다보면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게 되기도 하지만 「더불어숲」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였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이루어낸 만남이었다. 저마다 걸어 온 길이나 골몰하고 있는 일들이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무척 가깝게 느끼고 편하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것을 가능하도록 뜸들인 것이 바로 홈페이지였으며 홈페이지 또한 그러한 만남에 의하여 뒷받침됨으로 하여 그 속에 사람의 숨결을 담아가기도 하였다.
이번에 출간되는 책은 그런 점에서 단지 가상공간의 인쇄(印刷)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의 모든 만남을 아우른 즉 가상공간에서의 만남과 현실공간에서의 만남을 아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출판 이후를 겨냥하는 또 하나의 준비이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홈페이지나 모임에서 동떨어져 있던 많은 비슷한 나무들과의 만남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매일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매일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어긋나고 헤어지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위로와 격려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소중함이야 다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은 일 하나를 도모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다만 자기 하나를 고독하게 간수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만남을 필요로 한다. 만남은 무엇보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視覺)을 하나 더 갖게 해준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방황(彷徨)과 칩거(蟄居)는 대부분이 그러한 시각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이 새삼스런 모습으로 다가오듯이 자기를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바라보게 해주는 시각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한 시각은 무엇보다도 먼저 타인(他人)이라는 대상적(對象的) 존재의 부당성을 깨우쳐준다. 나와 타인사이에 놓여있는 원천적인 비대칭성(非對稱性)을 적발하게 한다. 자기도 누군가의 타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만남'의 참다운 의미를 터득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을 꾸준히 쌓아가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망(關係網)에 눈뜨게 한다. "사람은 만남의 역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홈페이지라는 선물에 뒤늦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홈페이지를 감옥이 아니라 '집(home)'으로 만들어 준 여러 사람들의 애정과 수고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더불어숲」과 함께 어김없이 켕겨오는 고민이 있다.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지 말라."는 충고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충고는 칭찬보다는 꾸중에, 동의보다는 비판에 귀 기우리라는 뜻이며 나아가서는 모름지기 전장(戰場)에 나서라는 뜻이기도 하다. 숲 속에 있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전장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숲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켕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더불어숲」에서도 그러한 논의가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으로부터 다시 무슨 일이든 함께 꾸려가지 않는 한 모든 위로(慰勞)는 결국 도피(逃避)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반면에 숲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같이 힘든 현장을 가진 사람들임을 조용히 깨우쳐주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숲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울창하고 달려가는 숲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찬 물 한 바가지로 타는 목마름을 가신 다음 화살처럼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반면에 병사가 말에서 내려 나무에 말고삐를 매고 물가에서 상처를 씻는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그림을 동시에 들어 보인 사람도 없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현장(現場)보다는 연대(連帶)의 장(場)이 더욱 절실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샘터찬물이 있는 숲, 다정하면서도 엄정한 숲,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진 숲을 가꾸어나가는 일 그것이 오늘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이 바로 이러한 고민들을 공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숲이 되기를 바란다.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열고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키는 인간적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급변하는 환경과 변화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인간적인 삶을 지켜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나아가 우리를 지키는 튼튼한 진지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있는 질그릇이 어느덧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따뜻한 가마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2001년 5월 15일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2001.6 도서출판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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