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감역의 말 | "인간은 역사 속에서 걸어나오고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이 책을 쓴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는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불우한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어디에도 서른세 살의 청안을 느낄 수 없다. 인간 이해와 역사 인식에 대한 난숙하고도 깊은 시각은 지명(知命)의 나이를 넘긴 우리마저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나카지마 아츠시는 고작 2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책에 실린 <이능>과 <제자> 두 편만 중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단편이다. 짧은 생애에 적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사후에 발표된 유고이다. 그의 문학적 성가(聲價) 역시 대부분의 천재작가와 마찬가지로 사후에 얻은 것이다.
나카지마는 1909년 5월 5일 도쿄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해 고향의 조모 슬하에서 길러졌다. 유명한 유학자인 조부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지만 그는 조부의 유풍이 짙게 남아 있는 가풍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근저를 이루는 한학의 기초가 된다. 여섯 살 되던 1915년 재혼한 아버지와 계모의 슬하로, 아버지의 임지인 나라현으로 옮겨진다. 이 시절 그는 계모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감나무에 묶였다가 아버지의 퇴근 직전에야 풀려나기를 여러 번 하는데, 이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속에 단단한 아픔을 안고 자라게 된다. 1923년 첫번째 계모가 죽고 1925년에 두 번째의 계모를 그리고 1926년에 세 번째의 계모를 맞는다.
불우하고 고독한 가정에 비해 그의 학교 생활은 찬란한 양지였다. 줄곧 최우등 상장과 상패로 전교생의 기대와 동경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그는 서울의 용산중학교 교사로 전임되는 아버지를 따라 용산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다. 1922년 경성중학(현 서울중고등학교)에 진학해 1926년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의 제1고에 입학하기까지 조선에서 학창 생활을 보냈다. 제1고 시절의 단편 <순경이 있는 풍경>은 당시 금기였던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쓴 작품이다.
제1고를 졸업한 후 동경제국대 문학부 국문학과에 입학해 1933년에 졸업했다. 제1고 시절부터 복잡한 가정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문학에 정진할 수 있었으나, 늑막염으로 1년을 휴학하고 천식 발작에 시달리는 등 여전히 안락한 생활을 얻지는 못했다.
그의 결혼에는 곡절과 사연이 많다. 대학 시절 친구의 누님이 경영하는 마작 클럽의 여종업원 다카(橋本タか)와 ‘인생을 건’ 애정을 나누게 된다. 다카는 아이찌겐(愛知縣)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양녀로 숙모집에 입양되고 다시 양오빠를 돕기 위해 상경한 얼굴이 희고 꾸밈새 없는 여자였다. 두 사람은 양가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쳐 격리, 이별, 오해 등 길고도 아픈 세월을 인내한 다음 그가 요코하마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1936년에야 이미 출생한 장남 다케시와 함께 비로소 가정을 꾸리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신뢰와 인내가 없었으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요코하마 여고 교사 시절 8년 동안이 그의 짧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비록 천식 발작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한편, 집과 정원과 꽃과 처자와 함께 했던 시절이었으며 그의 문학 세계를 풍요하게 일구어낸 자양의 땅이기도 했다.
그는 작고하기 1년 전 학교를 휴직하고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양으로 요양을 떠난다. 9개월 여의 남양 요양에서 돌아오자 다시 폐렴이 악화되어 신열과 불면에 시달리다 결국 1942년 12월 4일에 세상을 떠난다. 《빛과 바람과 꿈》(1942. 7. 15)과 《남도담(南島譚)》(1942. 11. 15) 두 권이 생전에 출간된 창작집이다.
나카지마의 초기 작품 세계는 이른바 실존주의적 모색과 대응으로서 기본적으로는‘세계’와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는 주어진 소여(所與)에 대한 실천적 대결에 의해 세계 그 자체를 무한히 확대해야 한다는 의지를 확인하면서도 자기를 바칠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관념적 고뇌’와 ‘형이상학적 미몽의 형이상학적 방기’가 그의 초기 문학의 정신적 영역이라고 평가된다. 나카지마의 이러한 실존적 정신 세계는 그의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유별난 환경과 만주사변과 군국주의 등 역사적 상황에 절망하던 일본 지식인들의 고뇌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은 그의 이러한 실존주의적 정신 세계가 그 관념성의 그림자를 내면화하고 소여(所與)와 ‘어리석음’에 좌절하면서도 자신의 ‘생’ 그 자체를 팽팽히 맞세움으로써 생과 사를 역사 속에 각인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절망의 심연에서 걸어나와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사회와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실천의 인간상’을 구현해 내는 나카지마 특유의 문학 세계가 비정하리만큼 담담한 문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산월기>는 1942년 7월 《문학계(文學界)》에 발표된 첫 작품이며, <명인전>은 같은 해 12월 《문고(文庫)》에 발표된 최후의 작품이다. <제자>는 사후인 1943년 2월 《중앙공론(中央公論)》에 그리고 <이능> 역시 사후인 1943년 7월 《문학계》에 발표되었다. 특히 <이능>은 발표 이듬해인 1944년 8월 노석대(盧錫臺)가 중국어로 번역해 태평출판공사(太平出版公司)에서 출간할 정도로 본고장인 중국에서 높이 평가된 작품이다.
<산월기>는 당(唐)의 이경량(李景亮)이 가려 뽑은 《인호전(人虎傳)》을 대본으로 한 작품이다. <선실지(宣室志)> <태평광기(太平廣記)>계의 인호전이 아니라 후인들이 내용을 첨가한 <당대총서(唐代叢書)>계의 줄거리를 대본으로 삼았다. 중국 고담을 전거로 하고 있지만 <산월기>에서는 이러한 소재들이 전혀 다른 주제로 재구성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묘사만 하더라도 <인호전>에서는 원참이 이징의 가족을 찾아가는 후일담으로 끝나 고담의 전형을 답습하고 있지만, <산월기>에서는 새벽달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의 울음으로 끝맺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치밀한 계산을 읽을 수 있다.
<산월기>의 작품 주제는 산월기와 함께 <고담(古譚)>에 수록된 작품군에서 오히려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한마디로 광(狂)과 사(死)의 세계이다.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군국주의에 대한 역사 인식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 쪽에 중심이 기울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산월기>에서는 고담이라는 허구를 빌려 이러한 실존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상대화하는 한편, 오히려 ‘세계’에 대한 ‘자아’의 실천적 자세에 비중을 싣고 있다. 그 실천적 자세가 오로지 윤리적으로 접근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와 주체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점은 주로 이징이 호랑이로 변신되는 계기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짐승으로의 변신 즉 이징의 좌절은 한마디로 ‘겁많은 자존심과 존대(尊大)한 수치심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은 ‘존대한 자존심’과 ‘겁많은 수치심’의 도치로 보인다. 그것은 이러한 도치를 통해 자존심과 수치심의 내용을 밝히고 그 둘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인격의 총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족한 재능과 그것을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자존심 그리고 평범한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낮은 데에 내려 서기를 거부하는 수치심을 하나로 묶어 이것을 인간적 성실성과 실천적 자세의 방기로 규정한다.
인간이 ‘광(狂)’과 ‘사(死)’의 부조리 속으로 매몰되는 과정을 스승을 찾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하기를 게을리하는 인간적 성실성의 방기, 즉 ‘어리석음을 위하여 죽음으로써 세계를 무한히 확대하는’ 자세의 방기로 설명한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엇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다”는 독백이 그것이다. 원참은 이징의 시에 대해 그 탁월한 재능과 높은 격조를 인정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는데, 이는 처자식의 굶주림보다 시업의 성취에 집착하는 이징의 비인간적 불성실을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월기>는 물론 시인 이징의 정신 세계와 시혼(詩魂)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인의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보편적 삶의 자세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 자신의 비극을 대면하게 하고, 우리 스스로 기르고 있는 우리 내부의 ‘짐승’을 자각케 한다.
<산월기>는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을 뿐 아니라 암담했던 군국주의의 광기 속에서 일본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뇌를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명인전>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가 작고하던 그 해 그 달에 발표된 최후의 작품이다. <명인전> 역시 <산월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전에서 소재를 얻고 있다. 부분적으로는《장자(莊子)》 《전국책(戰國策)》 등에서 취했으나 기본 골격은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 제14장과 황제편(黃帝篇) 제5장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 구성은 <산월기>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일관된 문학적 주제에 따라 재구성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명인전>의 주인공 기창 역시 <산월기>의 이징처럼 성취에 집착하는 철저한 ‘행동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이징의 목표가 시작(詩作)이라는 정신적 영역임에 비해 기창은 ‘천하 제일의 명궁’이라는 육체적이고 기술적 차원의 대상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징은 ‘존대한 수치심’과 ‘겁많은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결국 실패하는 데 반해 기창은 지사(至射)의 경지, 나아가 불사지사(不射之射)의 경지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활’ 그 자체의 이름과 용도마저 잊어버린 명인의 경지에 이르러 마침내 표정과 언어가 사라진 나무 인형처럼 이윽고 무위(無爲)로 화(化)하여 연기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고뇌와 갈등이 해소되고 승화되는 구조이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명인상’은 비록 우화의 형식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피아시비(彼我是非) 등 일체의 차별을 무화(無化)하는, 이를테면 관념성 속으로 물러나 숨어 버리는 신비적인 것이다. 특히 하산 후의 이야기는 시종 사람들의 소문과 후일담 그리고 간접적인 묘사로 일관되어서 명인상 그 자체의 신비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는 나카지마의 치열한 문학적 과제가 <명인전>에서도 미완인 채 노장(老莊)의 세계, 신비 속의 인간으로 비켜나고 만 아쉬움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작고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발견된 유고 <제자>와 <이능>에서 바로 이 문제가 줄기차게 추구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다. <산월기>에서 제시된 문제 의식이 <명인전>의 철학적 알레고리 속에서 미완의 형태로 관념화되는 과정을 거쳐 ‘인간 관계’와 ‘역사’라는 장대한 드라마 속에서 역동적으로 추구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편 <제자>는 초고의 끝에 소화(昭和) 17년(1942) 6월 24일 밤 11시라는 탈고 일시를 추정케 하는 기록이 덧붙여 있으며 제목도 <자로(子路)>에서 <사제(師弟)>로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종이를 붙여 최종으로 <제자>로 낙착되는 과정이 역력하다고 전해진다. 이 제목의 변경 과정이 이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던져준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자로>라는 제명이 무리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로>에서의 ‘자로’인 것은 개인으로서의 자로가 아니라 시종일관 스승 공자와의 관계 속에 육화되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자로>보다는 <사제>라는 제명이 더 적절하다 할 수 있으며, 작가가 이 <사제>라는 제명을 놓고 고민한 점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제자’로 결정한 것은 사제 관계 그 자체가 분명 그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인 자로를 통해서 파악된 스승 공자와, 공자의 압도적인 대기권 속에서 숨쉬는 제자 자로가 함께 달성시킨 사제 관계가 인간 관계의 빛나는 전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관계’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조건이며 주체는 역시 ‘인간’이라는 작가의 인간 이해가 결국 <제자>로 제명이 낙착되게 했다고 생각된다.
<제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 《논어(論語)》 《사기(史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많은 전적(典籍)을 뿌리에 두고 있다. 이러한 전적들은 물론이고 공자와 자로 역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제자>에 묘사된 공자상에 대한 사계의 비판도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테면 공자상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었고 상식적이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주제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 관계 더욱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양당사자의 면밀한 분석에 의해 형성되는 가치 결합이 아니다. 더구나 자로에게 스승으로서의 공자는 어떠한 이용가치와도 관계 없는 몰이해(沒利害)의 대상이고 순수한 경애의 대상이다.
공자는 자로의 시각을 통해 묘사되고 자로는 공자의 시각을 통해 묘사된다. 자공(子貢)과 재여(宰予)까지도 결코 객관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제자>라는 제명이 암시하듯 작품 주제의 관철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작가의 인간관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인간을 개인으로서 이해하려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파악하려는 관념적 접근이다. 어느 개인에 대한 인간적 이해는 개인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의 총체 속에서 재구성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카지마의 인간 이해는 그의 정신사적 편력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산월기>의 ‘이징’과 <명인전>의 ‘명인’을 뛰어넘은 곳에 ‘자로’가 서 있는 것이다. 자로에게는 ‘짐승’의 내면을 이루는 ‘겁많은 자존심’이나 ‘존대한 수치심’의 흔적이 없으며, 기창의 강한 행동 의지를 갖추고 있기는 하되 그것의 지향점은 무위의 목우로 나아가는 관념화의 길이 아니다. 현실의 인간 관계 속에서 온당한 자기 위치를 찾아 그 곳에서 자신의 삶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정직하게 담아내는 너무나 인간적인 길에 그가 서 있는 것이다.
자로와 공자의 만남은 이 작품의 서두에서 묘사되어 있듯 부정적인 만남이었다. 사이비 현자인 공자를 골려 주려는 유협(遊俠)의 객기가 만남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부정적 계기와는 상관없이 자로는 사제라는 인간 관계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며, 공자단의 일원으로서 짐져야 할 초시대적 사명에 자신을 바치는 정직하고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완성한다.
자로의 공자에 대한 이해는 스승 공자와의 사상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로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제자보다도 스승에 가까이 다가선 제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결코 현실을 경멸하지 않으며 현재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천하만대의 목탁’으로서의 초시대적 사명을 깨닫는다. 명민하고 재기발랄한 자공이 아니라, 논리 정연한 재여가 아니라 우직한 자로에게서 가장 깊이 있는 스승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로에 대한 공자의 이해, 그것은 ‘이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뢰’이다. ‘형식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기피’가 우직한 실천성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읽고 있을 뿐 아니라 “자고(子羔)는 살아서 돌아오되 자로는 죽으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운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자로가 죽어 소금절임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공자는 저립명목하여 눈물을 흘리며 집안의 젓갈류를 모두 내다버리고 이후로 일체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제자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가 인간 관계의 실상이며 이상이어야 한다면 <제자>가 갖는 의미는, 그것이 사회 역사적 과제를 인간 관계라는 주관적 틀 속에 담으려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간 이해에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차피 먼 길에서는 짐을 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능> 역시 <제자>와 마찬가지로 사후에 발견된 유고이다. 퇴고를 거듭해 판독하기 어려운 곳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제명도 명기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그가 남긴 작가 수첩에는 ‘막북(漠北)’, ‘막북비가(漠北悲歌)’ 등 제명으로 추측되는 단어가 남아 있지만 <이능>이란 제명은 ‘가능한 한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담백한 제명’으로 후카다 큐야(深田久彌)가 붙인 것이다.
<이능>은 한무제 때 흉노대군과의 처절한 전투에서 죽지 못하고 포로가 된 비운의 용장 이능(李陵)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이능의 원정과 패전, 제2부는 사마천의 고뇌와 《사기(史記)》의 집필, 제3부는 호지(胡地)에서의 이능과 소무(蘇武)의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이능이 역사의 실제 인물이었던 만큼 《한서(漢書)》의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 <흉노전(匈奴傳)> <사마천전(司馬遷傳)> 등을 전거로 하고 있다. 《사기(史記)》의 <이장군열전(李將軍烈傳)>에도 이능에 관한 기술이 있으나 이능이 투항한 직후에 사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조부인 이광(李廣) 장군에 관한 것이고 이능에 관한 기록은 극히 간략하다. 따라서 <이능>은 작가가 그의 일관된 문학적 탐구 과정에서 재조명한, 이를테면 현재화한 이능상(李陵像)이다. 그러나 <이능>이 발표되자 곧이어 중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될 정도로 <이능>은 어쩌면 ‘전거 속의 이능’보다 더욱 풍부한 ‘역사적 진실’을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능과 사마천, 소무 세 사람이 펼쳐 나가는 인간 드라마를 중첩시킴으로써 작가는 이 작품에서 분명 그의 문학적 주제와 지평을 성공적으로 심화·확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 인간상의 중첩이기는 하되 사마천과 소무는 어디까지나 이능의 고뇌를 조명하는 지점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작가가 <산월기> <명인전>을 거쳐 <제자>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추구해 온 문학적 주제를 총화하려는 배려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제1장에서의 이능은 한마디로 이징, 기창, 자로를 총화한 인간상으로 제시된다. 대담하고 진지한 무장으로서의 면모는 일체의 심리 묘사를 제거한 짧고 명징한 문체와 더불어 강인한 용장 이능을 독자들 앞에 선명하게 세운다. 그리고 통절한 패전과 함께 비장(悲將)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비극적 전락은 사마천이나 소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이라는 모멸로, 소무는 억류와 핍박이라는 형태로 무너져 내리듯 다가온다. 이능, 사마천, 소무를 3개의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의 구슬처럼 각자의 운명을 한층 더 깊게 조명해 준다. 사마천은 <사기>의 서술에 심혼을 쏟고, 소무는 상상을 절한 결핍과 곤궁 그리고 한(漢)에 대한 충절의 의미를 뛰어넘은 운명과의 직선적 대결을 보여 준다. 이능은 좌절의 땅에서 마상(馬上)의 무장으로서보다 더욱 처절한 대결, 지극히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인식의 싸움을 겪어 나간다.
한토(漢土)에 남은 가족의 처단, 흉노의 젊은 좌현왕(左賢王)과의 우정, 한인(漢人)의 허식과 흉노의 소박한 진실, 그 위에 소무의 결백한 의지와 완숙하게 흉노인화한 위율(衛律)의 안거를 좌우에 대비함으로써 이능이 겪는 고뇌의 내면이 한층 더 투명하게 나타난다.
이윽고 소무는 빛나는 환국의 장도에 오르고 사마천은 《열전(烈傳)》 제70 <태사공자서(太司公自序)>를 끝으로 붓을 놓고 연소가 끝난 나뭇재처럼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능은 대사면과 한나라의 사신으로 호지를 찾은 옛 친구의 간곡한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귀환을 거부한다. 작가는 “그 후의 이능에 대한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구절을 적으며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끝마치고 있다.
<이능>은 역사의 와중에서 좌절한 운명을 뛰어넘은 장대한 인간 드라마로 읽히기도 하고, ‘국가와 개인의 문제’라는 사회·정치적 함의로 읽히기도 하며, 지식인의 지조의 문제 심지어 전향, 비전향의 시국 문제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나카지마는 <이능>뿐만 아니라 <산월기> <명인전> <제자>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지극히 절제된 필의(筆意)로 역사의 사람들을 단지 현재에다 생환해 놓는데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해 두고 있다. 견고하면서도 결코 과열하지 않는 그의 담담한 문장과 함께 그의 작품 도처에서 느껴지는 공간과 여백과 여유가 바로 그 점을 증거로 보여 주고 있다.
모든 문학 예술작품의 여백은 곧 독자와 관객들의 창조적 공간이다. 독자들의 몫이고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때와 장소를 초월해 생환된 역사의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이른바 ‘생환의 완성’도 어차피 당대 사람들이 고뇌해야 할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작업은 곧 역사를 완성시켜 가기 위한 실천이고 또 하나의 창조인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이 많지 않지만 작품의 소재와 전거가 중국의 고전이기 때문에 한문과 일본어를 동시에 번역해야 하는 이중의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명진숙 선생은 일찍부터 일본 근세문학 부문에서 연학의 업적을 쌓아왔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과제를 쉽게 풀어 내고 있다. 작품의 내용을 깊이 있게 통찰해 낼 뿐만 아니라 면밀하게 계산된 문체의 변화와 흐름까지 정확하게 포착해 옮겨내는 데 훌륭한 역량을 보여 주었다. 남다른 수고에 감사드린다.
스스로 마음내키지 않으면 여간해서 붓을 들지 않는 이철수 화백의 삽화가 곁들여졌다. 이철수 화백의 그림은 처음부터 완강하게 꿈쩍도 않던 그가 원고를 읽고 나서 순전히 “책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내켜서 그린 그림이다. 나카지마의 문학 세계를 그이만큼 깊이 있게 다가설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책의 해’임에도 어렵기는 오히려 더한 출판 사정에도 불구하고 물색 모르는 필자의 권유를 거두어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맡아 주신 다섯수레 김태진 사장님께도 감사드린다. 좀더 좋게 만들려고 두 번 세 번 겹일을 마다 않으신 편집부 여러분의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드린다. 좋은 책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사람의 희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많은 독자들로부터 따뜻한 성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1993년 6월 15일
신 영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