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우리시대 대표 석학
ㆍ<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지난 2007년 5월 16일 서울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늦봄 문익환 시 낭송의 밤’ 행사에 문 목사의 아내 박용길씨(가운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오른쪽 첫번째)와 함께 참석한 신영복 교수. |연합뉴스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그의 생애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영복이라는 사상가의 정신적 궤적을 따라가려면 그의 생애를 관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과 ‘관계’라는 화두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관념으로 구축한 이론의 성채라기보다는 비상한 성찰의 힘으로 그 자신의 생애를 압축하고 또 압축함으로써 만들어진 경험과 사색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20년 20일.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신영복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다. 신영복의 생애는 20년 수감생활을 분수령으로 젊은 시절의 신영복, 수인으로서의 신영복, 출감 후 문필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신영복으로 나뉜다.
신영복의 고향은 경남 밀양이다. 선친 신학상씨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교사였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고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천생 학자였다. 신영복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문식씨는 “그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 집필하고 계셨다”고 술회한다. 1995년 여든여덟 나이로 타계한 신영복의 선친은 여든둘에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을, 여든다섯에는 <김종직의 도학사상>이라는 책을 냈다.
서울 상대 홍릉제 무대 주름잡아
신영복은 부산상고를 거쳐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사상가로서 신영복의 풍모에 압도된 나머지 그가 고리타분한 책상물림일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학창 시절 동료들이 기억하는 그의 면모 가운데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명석함이 아니라 오히려 다재다능함이다. 대학동창 홍재영씨는 “그는 주변의 친구들을 항상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즐겁게 해준 엔터테이너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은 그의 유머 감각, 명랑하고 쾌활했던 성품, 장난기 등이다.… 그 당시 상대에는 홍릉제란 연례 축제가 있었는데 무대를 주름잡은 주인공은 언제나 신영복과 유장희였다. 신영복은 행사 사회부터 즉석 재담, 시나 가사의 낭송, 가장행렬에 이르기까지 끼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팔방미인이었다.”(<신영복 함께 읽기>)
대학 1, 2학년 때 신영복은 가정교사 일로 바빴다. 그가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3학년이 되던 1961년이다. 그는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종교단체 CCC 산하 경제복지회, 동학연구회, 고려대 연세대 학생서클 세미나를 드나들면서 마오쩌둥, 마르크스, 케인스, 슘페터 같은 이들의 책을 읽었다. 이후 그는 경제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1965년 무렵에는 숙명여대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1968년은 그의 인생 항로가 결정적으로 바뀐 해다. 당시 그는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통혁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는 대신 경제학과 교수로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혁당 사건은 그의 인생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1968년 여름 수사당국이 발표한 통혁당 사건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을 중심으로 1964년 3월 만들어진 통일혁명당이 무장봉기, 주요 시설 파괴, 정부요인 암살 등의 방법으로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학생, 지식인 등 33명이 기소됐다. 신영복은 수괴로 지목된 김종태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고 이문규는 이름만 알았다. 김질락과는 도합 열 번도 만나지 않았고, 통혁당의 존재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에야 알았다. 그러나 현역 군인 신분이던 신영복은 통혁당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그해 7월 구속된 후,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사형선고 후 신영복은 곧바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이송된다. 이곳에서 이후 ‘신영복 옥중 문학’의 서장을 알리는 글 한 편이 탄생했다. 바로 ‘청구회 추억’이다. 이 글은 1966년 봄 서오릉으로 가는 소풍길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우정을 나눈 여섯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교도소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기록한 것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신영복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맨 먼저 읽을 글을 고르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청구회 추억’을 추천하겠다”고 말한다. ‘청구회 추억’은 화장기 없는 필치로 경험을 가감없이 기록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을 남기는 신영복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청구회 추억’ 옥중문학 서장 알려
1970년 5월 신영복은 사형수에서 무기수가 됐다. 그는 같은 해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71년 2월에는 다시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거기서 15년을 보내고 수감생활의 마지막 2년은 전주교도소에서 보냈다. 그에게 교도소는 육체의 감옥이었지만 정신의 학교였다. 청춘을 잃었으나 지성의 깊이와 높이를 얻었다. 신영복의 육체가 스물일곱 청년에서 마흔일곱 중년사내로 쇠퇴하는 동안 신영복의 정신은 관념의 모험을 추구하는 반항아로부터 삶의 구체성에 뿌리박은 사상가로 성숙했다.
교도소에서 그는 일반사범으로부터 사상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무수한 책을 읽었다. 겨울이면 추위에 떨고 여름이면 바로 옆에 누운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교도소 생활은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민중’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4년 동안 같은 감방을 쓴 한학의 대가 노촌 이구영 선생과의 만남은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이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서양 근대사상의 한계를 자각하고 ‘관계의 철학’을 사유하게 하는 주춧돌이 됐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과 성공회대 재직 중 고전강독 강의를 책으로 묶어낸 <강의>(2004)는 이 같은 그의 감옥 체험이 깊은 성찰의 힘과 만나 탄생한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강의>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정수인 춘추전국시대 중국 사상가들의 사상을 풀이한 책이다. 그의 동양고전 읽기는 단순히 옛 성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고답적 행위가 아니다.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제를 바탕에 깐 <강의>에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화두가 있다. 바로 ‘관계론’이다.
“뜨거운 이야기를 조용하고 부드럽게”
그가 보기에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존재론이라면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는 그 속성상 부단히 자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바, 이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기 증식의 속성은 개별자들 사이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타자를 배제하거나 정복하는 논리로 나아간다. 그는 이같은 관점에서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다.
이에 비해 관계론은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신영복은 이러한 동양고전의 사고 체계가 서구 인식론의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의 핵심적 구성원리를 한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하면 각기 ‘동(同)’과 ‘화(和)’의 논리다. “동은 이를 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의 논리를 화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강의>, 1장 서론 중)
신영복은 너른 품을 가진 사상가이자 일가를 이룬 문장가이기도 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같은 그의 에세이들은 많은 글쟁이들을 부끄럽게 만든 책으로 회자된다. 기자 출신으로 출소 후 신영복의 성공회대 첫 강의를 취재했던 허문영씨(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왔을 때 한국의 많은 문인들은 그의 글이 지닌 힘에 압도됐다”고 말한다.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소설가 조정래씨는 “그이의 글의 마력과 매력은 뜨겁고 강하고 아픈 이야기를 낮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서평을 분석한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현학적이되 지혜를 잃지 않았으며, 과장되지 않되 사유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으며, 단아하고 짧되 관점을 잃지 않은 문장에 독자들이 매료되고 만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 바탕에는 신영복이 일관되게 견지해온 삶의 자세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이 자리잡고 있다.
신영복은 오랫동안 사람과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강조만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더 나은 세상으로 가려는 진보의 앞길을 가로막는 냉혹한 정글의 논리를 사랑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한 것은 아닐까. 그 믿음에 대한 강조는 자칫 개인적인 자기수양의 지침으로만 그칠 우려가 있지는 않을까.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우리의 개혁과 진보는 여전히 ‘투쟁 패러다임’이라는 덫에 갇혀 있다”며 “신영복의 메시지가 비현실적이라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자가당착”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래전에 ‘투쟁 패러다임’을 내버렸기에 자신의 메시지를 투쟁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독이 많아졌다. 신영복을 탓할 수는 없다. 그는 실천 없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신영복 함께 읽기>)
◇ 참고자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나무야 나무야>(돌베개)
<더불어 숲>(중앙m&b)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