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8/23] 정년퇴임 앞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
2006-08-23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지난 1988년, 20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얻은 사람과 삶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으로 우리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신영복 교수.
자신의 감옥생활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말해왔던 그가 지난 89년부터 몸담아왔던 성공회대학 교수직을 오는 25일 공식 퇴임합니다.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분노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해왔던 신영복 교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성공회대 사회학부 신영복 교수를 초대해서 그가 살아온 60여년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그가 바라보는 오늘의 사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씀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성공회대 사회학부 신영복 교수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63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1965년에는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끝에, 1988년 8월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해왔고.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등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지난 6월 8일에 일반인들까지 포함한 분들을 모아놓고 정년퇴임 기념강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25일에 퇴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갖는다고 들었습니다. 18년 동안 교수로 일해 오셨는데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실 것 같습니다.
신영복 : 그렇습니다. 저로서도 정년퇴임의 감회가 깊습니다. 우선 학교에서 정년을 맞는 것이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 참 다행스럽고 아름답다는 얘길 들어서 아주 기쁘구요. 그래서, 그런 기쁜 느낌을 단순한 퇴임식 형식으로 담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축제 같은 형식으로 하는 게 좋다는 학교 교수들의 의견이 반영돼서, 일단은 콘서트 형식과 정년퇴임식을 같이 하는 모양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대개 교수님들의 퇴임식은 근엄하게 해야 되는데, 가수들도 나오고 상당히 잔치같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학교 제자가 아니어도 가고 싶으면 가서 볼 수 있는 건가요?
신영복 : 그렇습니다. 일단 학교에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송했고 그걸 못 받은 분들도 배제되지 않습니다. 야외에서 하니까 자리가 넉넉하고 같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성공회대학 캠퍼스에서 하는 거죠?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지난주에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보통 교수님이 퇴임하거나 회갑을 맞으시면 제자 분들이 논문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게 관례인데, 여기에는 교수님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온 63명의 필진이 책을 냈더라구요. 재밌는 건 문집을 낸 분들의 모임 이름이 '신출귀모'던데 무슨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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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
신영복 : 말씀하셨듯이 대개 회갑기념 논문집 또는 정년퇴임 기념문집들은 대개 후배교수들이 전문논문을 모아서 논문집 형식으로 출판하는 게 관례였죠.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는, 제 경우에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고.. 논문형식의 문집은 사람들에게 썩 많이 읽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훨씬 더 재밌고 깊이있게 일반인들도 공유할 수 있는 책을 만들자고 합의하고, 그걸 위한 준비모임을 신출귀모라고. '신영복 선생의 출판을 귀하게 생각하는 모임'의 줄임말로 재밌게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선생님이 평소에 사회과학을 한참 열심히 할 때 젊은이들의 생각이 '사회를 통해서 사람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보다는 사람을 통해서 사회를 보라는 말씀을 많이 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책도 사실 신영복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사회를 보기도 하는 책이라고 생각되는데요, 63명의 글을 상당 부분 읽어 봤는데 좋은 글들이 많더라구요. 어떻습니까? 63명이 본인의 사상이나 삶에 대해서 쓴 걸 보면 복도 많으시다는 생각도 드는데, 본인을 놓고 여러 분이 글을 쓰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영복 : 그런 면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 원고들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느끼는 심정이 참 착잡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이 어떤 것일까, 여러 인격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실관계도 나와 다르게 이해하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이걸 바로잡아야 되나 고민을 했는데 결론은 그냥 두자.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들 속에 흩어져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이 결국은 가장 정직한 인간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오히려 고맙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본인이 생각하시는 본인과, 여러 분들이 쓰신 신영복이라는 인물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영복 : 그렇습니다. 그건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고 기억되는 게 아닌가 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신영복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진 게 88년입니다. 저도 그 당시 평화신문에 나왔던 선생님 글을 보고 상당히 감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사실 개인적인 서신 아니었습니까.. 그게 글로 나왔을 때 사회에서 보여준 반응들에 대해서 본인께서도 상당히 의외였을 것 같은데, 어떠셨습니까?
신영복 :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들이 책으로 나온 거죠. 그것도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만들어졌구요. 처음 평화신문에 몇 회에 걸쳐 연재될 때는 저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아는 교도관이 와서, 사회에서 선생과 관련된 사건이 터졌나보다고, 안기부에서 교도소에 와서 서신대장을 전부 검토해 갔다고 그래서 상당히 걱정했는데, 나중에 평화신문에 연재된 걸 제가 알았죠. 그때 편지글들이 사실은 가족들에게 보내는 일반적인 편지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 제가 감옥에 들어가서 충격적으로 받았던 많은 생각들을 그냥 두면 물처럼 다 흘러가지 않을까, 그래서 어딘가에 기록해 두면 언젠가 다시 이 시절을 회고할 수 있겠다. 그래서 유일하게 허용된 집필공간이 집으로 보내는 엽서였거든요. 한 달에 한 번, 징역을 오래 하면 한 달에 두 번. 그래서 기록했던 것들이고. 아마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 고민했던 것들이, 비슷한 환경에 있는 많은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이뤘지 않을까 합니다.
박인규 : 어떤 작가 분은 2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신영복 선생 정도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면 나도 해보고 싶다고 농담 비슷하게 말씀하시는데, 지금 돌아보시면 20년이라는 세월이 본인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신영복 : 저는 그 20년의 시절을 그냥 갇혀있던 시절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정말 나 자신의 여러 가지 관념적인 면, 책으로 학교에서 배웠던 틀에 박힌 생각들을 반성하는 시절. 그래서 크게는 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점, 사람이 어떤 역경을 견디는 자세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경 이후의 상황을 위로로 삼으면서 현재를 견디는 방법은 좋은 건 아니라고 봐요. 그 자체가, 힘들고 고생스러운 역경 자체가 뭔가 깨달음을 주고 자체로 보람있는 것일 때 진정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제가 갇혀있던 시절이 비록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던 세월이었지만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사회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아주 귀중한 시절이었고, 그 사람들의 수많은 삶들을 통한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의 대학시절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저로서는 참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많은 생각들을 그 속에서 건져 올렸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감옥에 들어가실 때에는 사회체제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젊은 경제학자셨습니다. 20년 뒤에 나오신 다음에는 사상가랄지, 동양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으시고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내신 서예가로 변모라면 변모하셨는데, 감옥에서 동양철학과 서예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신 걸로 압니다. 나름대로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신영복 :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저희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이 사실 6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때가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우리 사회 전체가 우리 전통과 역사, 문화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기 어려웠어요. 식민지도 겪었고 처참한 전쟁의 파괴, 또 부정한 정권의 부패한 사회적 현상도 많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 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보다는 오로지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질주했던 시기였는데, 제가 감옥에 들어가서 과연 이런 방식이 옳은가라는 반성. 그래서 오래된 동양적 고전을 읽자, 근본적인 사유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읽게도 되고. 또 현실적인 이유로, 징역 초년에는 재소자 규정을 보면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돼 있어요. 사전이나 경전은 제외하고. 다 읽고 반납하면 그 다음에 책을 넣어주는 규정이 있었는데.. 징역 초년 독방에서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텐데 도저히 책을 댈 수가 없어요. 제 경우는 서울에 계신 노부모님이 보내주셨거든요. 그래서 한 권으로 오래 읽기에는 노자나 주역 같은 동양고전들이 좋아서 그런 점에서도 동양고전을 초년에 많이 읽게 됐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까 감옥에 가시기 전에 20대 중반까지의 삶을 본인께서는 심부름 같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신영복 :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간을 세 토막으로 나누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감옥 가기 전의 20년. 감옥에 스물일곱에 갔지만 학교 들어가기 전 7살 빼면 20년, 감옥이 20년, 그 이후 20년. 이렇게 나누기도 하는데, 감옥 이전에는 역시 학교에서 공부했던 시절이니까, 어떤 사회든 그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사회문화제도가 있고, 개인의 경우는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 그런 사회적인 문화와 의식을 주입받게 되는 요인이 강하죠. 그런 점에서 그 당시 내가 나의 정체성, 주체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사실은 크게 보면 심부름 같은, 내 것이 아닌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걸 감옥 20년 동안 많이 반성할 수 있었던 경험을 가지고 그 시절을 심부름 같은 시기였다고 얘길 했습니다.
박인규 : 하지만 선친께서는 교육자셨고 사명당 연구를 깊이 하신 걸로 압니다. 어렸을 때 아버님으로부터의 가르침이 상당히 신 선생님의 사상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고 많은 분들이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떠십니까?
신영복 : 저희 세대 부자간에는 지금과 달리 별로 대화가 없죠. 그러나 아버지의 서재는, 그 당시 아버지께서 교사였고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집에 책이 많았어요. 그래서, 돌이켜 보면 제 누님들이나 형님들이 읽는 책들을 저도 따라서 다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특별히 개인적으로 저한테 영향을 주셨다기보다는, 아버님이 갖고 계셨던 장서들이 자연스럽게 영향력으로 옮아왔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인규 : 지금부터는 신영복 교수님의 삶의 3부라고 할 수 있는 감옥 이후의 삶에 대해서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후에 선생님의 주요 저서로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을 많이 꼽고 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는 국내의 주요한 곳들을 다니시면서 쓴 기행문이고 '더불어 숲'은 세계를 다니시면서 쓰신 기행문인데, 나무는 어떻게 보면 사람, 개인을 말씀하시는 것 같고 더불어 숲은 사회를 말씀하시고 계신데, 나무에 비유한 이유가 과연 뭐냐. 나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수동적인 존재일 수도 있는데, 나무라는 게 선생님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사회의 이상적인 구성원 같은 느낌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냐. 그런 지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영복 : 그렇습니다. '나무야 나무야'라는 기행글을 실은 책, 그리고 해외기행인 '더불어 숲'은 연작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거기 보면 서간체 형식이구요, 서간체기 때문에 수신인이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글 속의 존재가 설정돼서 그 '당신'에게 부치는 편지고, '당신'을 나무로 상징하고 있는데, 그 나무에 특별히 많은 의미를 붙이기는 외람되지만 사람도 나무라고 생각해요. 이건 일종의.. 사람은 전혀 글로벌하지 않다는 함의도 담고 있습니다. 나무를 옮기는 것은 나무로서는 엄청난 고통, 또 다시 뿌리내리는 데는 굉장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땅,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자기의 잎과 꽃을 피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 그리고 숲은, 사실은 나무가 개별적 존재일 수는 없고 숲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더불어 숲이라는 얘길 했는데, 나무의 완성이 숲이다. 그래서 나무와 숲을 책 제목으로 삼기도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자연과 역사와 문화와의 관계성을 우리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함의도 들어 있구요, 나무가 나무를 만나서 함께 지켜나가는 숲의 이미지. 이게 오늘날의 글로벌한 세계주의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도 그 속에서 이끌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더불어 숲'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이랄까요? 그 이름으로 하시는 활동이 몇 가지 있다고 하던데요,
신영복 : '더불어 숲'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됐는지.... '더불어 숲' 하고 아래에다가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런 단서를 달고 있는데. 그 책을 읽고, 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신영복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그 홈페이지 이름이 더불어 숲입니다. 거기에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에서 이런저런 작은 모임들을 만들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어떤 실천들도 약속하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박인규 : 선생님이 만들어 내신 독특한 서체. 백성'민'자를 써서 '민체'라고도 하고, '연대체', '어깨동무체'라고도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글자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 글자가 만들어내는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 그런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모 소주회사의 라벨 '처음처럼'이라는 글씨를 써주셨어요. 그래서 그 회사가 사업상으로 큰 득을 보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은 신 선생님의 평소의 생각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이신데 어떻게 그런 상품에 글을 쓰셨느냐. 연유가 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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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
신영복 : 저도 그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붓글씨라는 게 그래도 예술장르에 속하는데 이게 상품의 브랜드로 쓰일 수 있느냐. 그렇게 비판적 견해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소주 브랜드를 만든 디자인 회사 대표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쓰게 됐는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쓴 글씨체를 흔히는 궁중체의 귀족적 미학과는 구별되는, 상당히 서민적인 민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가장 서민적인 술인 소주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운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위로해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박인규 : 결혼을 좀 늦게 하셨죠?
신영복 : 제가 출소한 이후에 했으니까요
박인규 : 개인적인 가족생활을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신영복 : 저는 총각으로 20년을 징역 살았기 때문에 나왔을 때 이미 48세였는데, 그때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병석에 계셨어요. 저희 집안이 상당히 완고한 집안이고,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빨리 결혼하라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해야지, 여태까지 그렇게 불효한 것을 씻으려면 빨리 결혼하는 모습을 돌아가시기 전에 보여드려야 된다. 그래서 저도 빨리 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효도하시기 위해서
신영복 :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제 아는 분들이... 저는 전혀 몰랐는데 그래도 우리 형편이나 나한테 잘 어울린 만한 사람을 봐 뒀나 봐요. 저는 그 분들의 성의라든가 이런 걸 신뢰하기 때문에 아주 쉽게 결혼했습니다.
박인규 : 자제분은 몇 분입니까?
신영복 : 제가 결혼하고 1년 후에 아들을 얻어서, 지금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박인규 : 제가 예전에 김성훈 장관님과 말씀을 나눠 봤더니, 아들이 아빠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굉장히 싫어한다던데 그런 고충은 없으십니까?
신영복 : 그런 점이 있겠죠. 오히려, 싫어하기 보다는 저희 쪽에서 걱정이죠. 왜냐하면 자녀들이 좀 사회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부모가 옆에 있어주지 못하니까. 걱정이라는 생각을 하죠.
박인규 : 선생님의 글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우리네 삶이나 사회에 대해서 굉장히 깊은 통찰을 담고 있고 도움이 되지만, 지금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나 전망은 없는 게 아니냐. 그런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답변 겸 해서 앞으로의 연구생활이랄까 계획 같은 걸 말씀해 주시죠.
신영복 : 제가 쓴 글들이, 감옥에서 썼던 건 역시 외부의 정보가 제로인 상태였기 때문에, 또 감옥에서의 사유형식도 굉장히 논리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구요. 그 이후에도 제가 출소해서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격동하는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시사적인 문제와 현안을 따라가는 데는 시간적인 지체가 있어서 자연히 그런 내용과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들어 보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그게 저같은 경력을 가졌거나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보다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거론하고 그걸 다시 성찰하게 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되는 게 아닐까. 일종의 자위이기도 하고 변명일 지도 모르지만, 역시 서로 역할분담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퇴임 후에도 강의는 계속 하시죠?
신영복 : 그렇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학교에 남아있게 되구요, 2학기에도 대학원에 강의가 하나 개설돼 있습니다.
박인규 : 앞으로도 좋은 강의,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프레시안 박인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