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 산지박(山地剝)괘의 그림입니다. 절망과 역경(逆境)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나목의 가지 끝, 삭풍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실을 씨과실이라 합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이 씨과실(碩果)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새봄의 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우리의 몫이며,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석과를 새싹으로, 다시 나무로 키우고, 숲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장구한 세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먼 여정은 무엇보다 먼저 엽락(葉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잎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환상을 청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체로(體露)입니다. 잎을 떨어뜨리면 뼈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뿌리를 거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역경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