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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감
우리들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로마는 마지막으로 보아야 하는 도시‘라고 합니다. 장대한 로마 유적을 먼저 보고 나면 다른 관광지의 유적들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의 자부심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제일 먼저 로마를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장 진지하게 반성할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문명관(文明觀)이란 과거 문명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격언처럼 로마는 도시의 대명사이며, 로마 제국은 국가의 대명사로 군림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Roma를 거꾸로 표기하면 라틴어의 ‘사랑’이라는 단어 Amor가 된다는 것까지 찾아내 로마에 대한 애정을 헌사하고 있습니다. 트래비 샘에는 다시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며 로마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이미 우리의 머리에 깊숙이 각인된 로마의 역사와 눈앞의 장대한 유적들이 행복하게 결합됨으로써 로마에 대한 경탄과 애정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만나는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 현장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현장들은 그 영화가 보여주던 낭만과 환상을 이 도시에 고스란히 입혀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낭만과 환상의 분식이 아니더라도 로마에 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상당한 감성의 앙등(仰騰)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로마의 업적을 인류사의 업적으로 보편화하고 그 업적의 일단을 공유함으로써 이 곳을 찾아온 모든 나라 사람들이 나누어 받게 되는 행복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로마는 로마 인의 힘만으로 건설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피정복민의 피땀과 재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서고금 어떠한 제국의 건설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테베레 강가의 작은 언덕에서 농업국으로 입국(立國)한 로마 인들의 근검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제국 건설은 로마 인들의 근검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제국 건설의 길이 비록 약소국 로마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로마의 문명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영광을 로마 인의 근검성과 실용적 문화로 설명한다는 것은 로마의 가장 아름다운 프로필에만 앵글을 고정시키는 영상의 트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2,000만 원 이상의 저축에 대해서는 근검 절약 이외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의 재부(財富)에 대해서도 근검 절약으로 설명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의 영광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로마 제국의 건설 과정을 로마 인의 용기와 도덕적 힘, 그리고 법치(法治)라는 미덕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제국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 제국의 건설 과정을 이러한 논리로 미화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제국주의를 간접적으로 변호하고 있는 어느 문필가의 저의에 마음 편치 않다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로마 유적을 돌아보면서 내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위용을 자랑하는 곳곳의 개선문은 어디엔가 만들어놓은 초토(焦土)를 보여줍니다. 개선 장군은 모름지기 상례(喪禮)로 맞이해야 한다는 <노자(老子)>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역대 수많은 장군들이 승전보를 들고 말을 달려 들어오던 신성한 길(Via Sacra), 전승(戰勝)에 은총을 내리던 신전.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 마음 어둡게 하는 것은 수많은 관광객의 줄을 이은 찬탄입니다. 로마의 유적에 대한 찬탄이 새삼 마음을 어둡게 하는 까닭은 그것은 곧 제국에 대한 예찬과 동경을 재생산해내는 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 유산 가운데 그 40%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은 세계사의 현주소를 걱정하게 합니다.
문화 유산을 선정하고 그것을 보존하는 일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유산을 유산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문명관은 참으로 막중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느 유적 앞에 서서 그 장대함을 경탄하는 행위는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북을 쳐서 키우고 박수를 쳐서 키우고, 칭찬하여 키운다는 옛말이 있듯이 나는 로마에서 우리가 키우고 있는 영웅상과 패권 문화로 말미암아 발길이 무거워집니다.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비토리아노를 바라보면 그 실상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비토리아노는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을 기념하여 로마 양식을 집대성해 건설한 전승 기념관입니다. 이 위풍당당한 기념관 앞에 서면 신성한 길 비아 사크라를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던 장군들의 얼굴과 뭇솔리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고대 로마의 영웅들과 뭇솔리니는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가장 먼저 로마를 방문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맨 마지막으로 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콜로세움입니다. 맹수와 맹수, 사람과 맹수, 사람과 사람이 혈투하던 원형 경기장입니다. 100만이었던 로마가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경기장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 경기장이 로마 인에게 미쳤을 영향력의 크기를 짐작케 합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건물 앞에 서서 건물을 바라볼 때는 크기를 보기 전에 먼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건물인가, 누구를 위한, 누구의 건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폐허가 되어 있는 콜로세움을 돌아보는 동안 이곳에서 혈투를 벌이다 죽어간 검투사들의 환영이 떠올라 극도로 침울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스텐드를 가득히 메운 50,000 관중의 환호 소리입니다. 빵과 서커스와 혈투에 열광하던 이 거대한 공간을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막막합니다. 내게는 여민락(與民樂)의 광장이 아니라 우민(愚民)의 광장으로 다가 왔습니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한다”고 하는 말이 콜로세움의 위용을 찬탄하는 명구로 회자되지만 내게는 콜로세움이 건설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혀집니다. “로마는 게르만인이나 한니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때문에 무너지리라”고 했던 호라티우스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어떠한 제국이든 어떠한 문명이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하부가 무너짐으로써 붕괴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입니다. 많은 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고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정복전쟁이 정지될 때 무너지기 시작하며, 로마 시민이 우민화될 때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로마가 로마 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 그때부터 로마는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콜로세움은 이 모든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탑이었습니다.

 

당신은 로마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콜로세움을 마지막으로 로마를 떠 날 때쯤 당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로마 제국은 과연 과거의 고대 제국일 뿐인가. 그것이 전쟁이든, 상품이든, 자본이든, 정복이 정지되면 번영이 종말을 고하는 오늘날의 제국은 없는가. 우리들은 진정 로마를 동경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콜로세움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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