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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10-02-03
미디어 (부산상업고등학교)

빛나는 추억의 재구성을 위하여

 

신 영 복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고등학교 시절만큼 깊은 영향을 받는 시기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시절이 너무 단조로웠었다는 후회가 없지 않다. 부산상업고등학교 3년이 가슴 설레는 추억으로 채워져 있지 못한 까닭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객지생활이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기도 하고 고향 동무들과의 단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진학을 접고 취직을 위한 진학이었다는 점이 아마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당시 우리 집은 가세가 현저히 기울어 둘째인 나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중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장래에 대한 뚜렷한 그림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대학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접는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좌절감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것은 물론 당시 실업계고등학교에서 부산상고가 누리던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매형이 바로 부산상업고등학교의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그 억센 사투리와 독일어 발음을 흉내 내듯이 유머감각도 없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김진수 선생이 바로 매형이다. 김진수 선생의 그런 면모는 물론 타고난 성격이기도 하지만 당시 그가 안고 있었던 일종의 좌절감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내가 알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별로 인연도 없는 피난지 부산에서 그것도 고등학교 교사로 주저앉게 되었다는 좌절감이었다. 나의 고등학교의 시작 역시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희망찬 출발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학교사택의 누님 댁에 기식하는 형태로 고등학교를 시작하였고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교사택에서 생활하였다. 사택이 학교와는 철조망 울타리 하나를 격하고 있어서 선생들이 드나드는 철조망 쪽문으로 나도 등교하였다. 등교 길의 추억이 있을 리 없었다. 버스로 통학하던 친구들의 에피소드가 부럽기도 하였다. 버스를 타고 대신동 구덕운동장으로 야구응원가는 길이 아마 고등학교 시절의 가장 먼 여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일요일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도 학교의 빈 교실에 앉아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때에는 아마 고교 1학년이 사춘기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시기를 혼자 독서로 채운 시간이 비교적 많았다. 독서는 어릴 때부터 갖게 된 습관이기도 했다. 누님과 형님들은 주로 아버님 서재에서 책을 꺼내 와서 읽었고 나도 따라 읽었었는데 비교적 조숙한 독서습관이 고교시절의 단조로운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조용한 대화방이기도 하였다. 일요일 햇볕 따스한 빈 교실에 앉아서 책 읽던 기억이 지금도 고교시절의 양지(陽地)처럼 남아 있다. 부산의 명물인 영도다리나 자갈치 시장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남아 있는 미완의 과제이다.

 

1958고교.jpg

- 사진: 1958년 고교시절 -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동창생들은 나의 이러한 모습보다는 아마 응원단장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응원단장 경력은 중학교와 초등학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응원단장이라는 어색한 조합에 대하여 지금도 가끔 질문을 받기도 한다. 화려한 의상과 현란한 춤동작 그리고 밴드까지 가세한 지금의 응원단장을 연상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응원단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교복을 입은 채로 앞에 나가서 구호선창을 하거나 박수를 이끌어내는 정도의 약소한 역할이었다. 그 역할이 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응원단장은 응원단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이미지가 있고 그것 또한 나의 엄연한 일부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빈 교실에서의 독서와 운동장에서의 응원단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심리적 대상(代償)으로서의 이중성(二重性)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응원단장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방학식을 마치고, 통지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하교 길에 나와 같은 반 아이가 길을 막아섰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실은 자기가 1등인데 너의 아버지가 교장선생이어서 선생들이 잘 봐주어서 네가 1등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친구들도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의 아버님이 교장선생이기는 하였지만 우리학교 교장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내가 그에게 뒤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아마 귀환동포였었고 나이도 나보다 두세 살 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말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우리가 4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담임선생이 내게 그 집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물어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신작로보다 낮은 대단히 허술한 집이었는데 그는 먼지 자욱한 마루에 동생 둘을 데리고 햇볕에 앉아 있었다. 어린 나의 눈에도 그 형제들이 굶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선 전기가 들어오는 교장사택에서 생활했던 나의 가정환경에 비해서 그의 처지는 참혹할 정도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맞다. 그 애가 1등이 맞다.” 그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나는 되도록 1등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들로부터 벌을 자초하는 장난을 저지르는 일을 계속했다. 운동장 한 가운데 그려놓은 동그라미 안에 꿇어 앉아있는 벌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을 달리는 벌을 자초하기도 했다. 교단의 교장선생과 앞에 줄지어 선 선생들의 뒤를 돌아 학생들의 뒤까지 크게 운동장을 몇 바퀴 달리는 동안 전교생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기도 하였다. 어수선한 조회분위기 때문에 교장선생이 벌을 중지한 적도 있었다. 전교생을 상대로 하는 이벤트였던 셈이다. 이러한 이벤트의 연장선상에서 응원단장으로 데뷔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벌 받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응원단장이기도 하였고 가장행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반 대표 축구, 농구 선수로 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판시간은 곤혹스러웠다. 가감산 정도가 고작이었고 곱셈은 느리지만 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나눗셈은 2,1천작 5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주판이야기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주판시간은 대체로 호산암산(呼算暗算)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쉬운 문제부터 시작한다. 차츰 빠르게 진행되면 손드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막판에는 굉장히 빨라져서 손드는 사람도 2, 3명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고난도의 빠른 문제의 정답이 연거푸 두 번이나 <2전>이었다. 그 다음이었다. 아마 최고난도의 문제였을 것이다. 한 두 명만 손을 들었다. 상당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 때 나도 손을 들었다. 선생님도 놀라고 교실전체가 와! 하고 일제히 놀라는 소리였다. 초반의 쉬운 문제에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손 든 적이 없었고 나의 주판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선생님이 나를 지명했다. 그런데 그 때의 정답은 <2전>이 아니었다. 폭소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내 방 책꽂이 한쪽에 주판 한 개가 얹혀있고 주판과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때의 광경에 이따금 고소를 금치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 중에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한글날을 기념하여 학교에서 시(詩) 백일장(白日場)을 실시했다. 내가 쓴 시가 국어선생님이던 살매선생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문예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산시 백일장(白日場)에 출전하도록 했다. 나는 학교수업을 면제받는 것이 좋아서 문예반 친구들과 함께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가 백일장에 참가하였다. 백일장 광경은 전혀 의외였다. 일반부, 중고등부 그리고 초등학교까지 망라된 대단히 많은 참가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드디어 북이 울리면서 시제(詩題)를 적은 두루마리가 아래로 펼쳐졌다. 시제는 ‘지도(地圖)’였다. 막막했다. 시제가 지도라니 너무 엉뚱하다 싶었다. 다른 학교의 참가자 중에는 이미 당시의 월간지 『학원』에 등단한 학생도 있었고 모자를 아래로 깊숙이 눌러 쓰고는 제법 시인처럼 멋을 부리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많은 참가자들이 두툼한 시작 노트를 한 권씩 옆에 끼고 있었던 것이다. 시제가 공개되자 그 노트를 뒤적여 그 시제에 어울리는 자작시를 찾아서 그것을 적절히 수정하여 시를 쓰고 있었다. 달랑 연필 한 자루만 가지고 참가한 나로서는 매우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대로 시상을 다듬어 적어 내고는 몇몇 친구들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미화당 백화점에 있는 문화극장으로 영화구경을 갔었다. 애초부터 거기에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우리학교에서는 유일하게 내가 입상했었고 수상자를 호명해도 대답이 없자 시상식 때까지 남아 있던 문예반 친구가 대신 국어사전을 상품으로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상식 때까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 탄로 나서 꾸중을 들었던 것은 물론이다. 막상 기억에 남는 일은 그 다음에 있었던 마산 문화제 시백일장이었다. 이번에도 살매선생은 나를 참가하도록 했다. 그리고 하루 전에 학교에서 참가자들을 불러 모우고 마산이 자기의 고향이기 때문에 마산 문인들이 혹시 자기에게 시제(詩題)를 출제하도록 배려할 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그런 경우에는 ‘길’이라는 시제를 출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미리 ‘길’을 주제로 시를 써 오도록 하였다. 이튿날 우리일행은 마산행 열차에서 각자 써온 시를 선생님께 제출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하나하나 수정해주셨다. 백일장 현장에서 징소리와 함께 시제가 공개되었는데 놀랍게도 시제가 ‘길’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랬었는지 뚜렷한 이유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이 열차에서 수정해준 대로 쓰지 않았다. 내가 썼던 글을 거의 그대로 써서 제출하였다. 결과는 장원(壯元)이 아닌 차상(次上)이었다. 장원은 경남여고 여학생이 차지했다. 이번에도 교무실에 불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교감선생님과 여러 선생께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왜 수정해준 대로 쓰지 않았느냐는 꾸중이었다. 꾸중을 듣고 교무실에서 풀려났을 때 미술 선생님인 김영덕 선생이 따라 나오며 고쳐준 대로 쓰지 않은 게 잘 한 것이라고 격려해주었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그 후로 김영덕 선생님과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미술반에 자주 들렀을 뿐 아니라 지금도 벽제에 사시는 선생님을 이따금 찾아뵙기도 한다. 작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청구회 추억』에도 소개했었지만 그 선생님의 작품 ‘전장의 아이들’은 그 시절 내게 깊이 각인된 작품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내 경우는 학교와 사택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 대부분이었고 몇 사람의 가까운 친구들과의 추억이외에는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 동창생인 경우도 많았고 졸업 후에도 부산대학교 등 부산에서 교우를 이어갔음에 비하여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에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거나 서울 소재 은행이나 직장에 취직한 친구는 많지 않아서 서울에서도 고등학교의 시절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물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거나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과의 만남은 위로이고 격려이기도 해서 시간이 나면 만났었지만 나의 서울 생활에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정교사 하느라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내가 다닌 서울상대에는 나 혼자만 입학하였다. 입학시험 때부터 서울의 일류고 출신들이 교정을 석권하고 있었고 대학생활 내내 그런 분위기였다. 2학년 때였던가. 부산상고 최연종 선배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나를 찾았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놓고 늦은 신입생환영회를 해주었을 정도였다.

사실 나는 대학에 갈 형편이 못되었다. 가족들도 물론 내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은행에 취직하여 집안을 돕기도 하고 또 앞으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그랬었지만 나는 3년 내내 주판이나 부기는 물론이고 상업경제도 마음 붙이기 어려웠다. 당시에 유행했던 실존철학에 기울어 까뮈와 사르트르를 읽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들었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졸업하던 해에는 아마 일반시중 은행 입행시험이 먼저였고 한국은행 시험이 나중이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이미 시중은행에 합격하여 막상 한국은행에 추천할 성적 좋은 학생이 부족하였던가 보았다. 매형인 김진수 선생에게 취업담당 선생님이 신영복은 은행취직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문의하였고 집안 형편으로는 대학진학이 어렵다고 하자 학교에서 나를 한국은행 입행시험을 보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동창선배이기도 하였지만 나는 입행시험 준비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한국은행 부산지점에서였던가 첫날 필기시험을 치렀다. 주판시험 시간이 역시 고역이었다. 가감산 밖에 하지 못하고 곱셈문제 일부를 하다 만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시험 감독관이 줄곧 내 옆에 서서 나의 답안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주판은 잘 못하지만 공부는 잘 하는 학생으로 고지가 되어 있었던가 보았다. 내가 첫날 필기시험을 치르고 나자 살매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은행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학선생님도 너라면 서울대 장학생도 가능할 텐데 왜 은행에 가려고 하느냐고 옆에서 거들었다. 둘째 날 면접시험에 가지 않았다. 사실 나로서는 입학금과 등록금이 면제되지 않으면 대학진학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입시 때 합격자 발표 하루 전에 수석합격자가 신문에 보도되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이튿날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갈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대학진학은 포기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혹시 낙방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확인하러 학교로 갔었다. 합격자 명단 옆에 수석합격자는 교무처에 오라는 별도의 고지 문이 붙어 있었다. 나도 교무처로 갔다. 성적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듣고 나왔다. 대학진학을 단념하고 늦게라도 취직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지내신 선친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지 나를 불러 입학금만 마련해주면 학교를 다닐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어려운 입학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대학생활이었다. 당시에는 장학금도 많지 않았다. 다행히 3학년 때부터 한국은행 총재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상고 선배인 한국은행 김진형 총재에게 인사를 갔었다. 나로서는 감회가 깊었다. 한국은행 입행시험 때의 일이 회상되기도 했다. 김진형 총재도 무척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애써 호출하려고 하여도 내게는 우리가 공감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아서 나 자신도 서운할 정도이다. 내게 부산상고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은 까닭은 물론 학교와 사택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수형생활 20년이라는 공백이 너무 큰 것이어서 고교시절의 추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추억도 자주 불러내어 친구들과 공유해야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2, 3년 동안에 서울에 있는 동창 몇몇 사람들이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만나고 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뒤늦게 고교시절의 추억을 더 많이 만나고 있는 셈이다. 생각하면 내게 고교시절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은 보다 중요한 이유는 나의 추억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재구성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추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어쩌면 고교시절을 공유하고 있는 동창생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사회변화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관계론’이라는 틀로 접근하는 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 틀은 어쩌면 학교공간의 특수한 관념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하면 나는 평생을 학교에서 보낸 셈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을 대체로 <대학이전 20년>, <감옥 20년> 그리고 <감옥 이후 20년>으로 나눌 수 있다. 만약 <감옥 20년>을 학교로 쳐준다면 계속 학교에 몸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가끔 <감옥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학교가 나의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다. 학교에 입학하기전의 7년도 사실은 학교생활이었다. 학교사택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도 학교에서 지냈다. 누나들과 형이 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지내기가 무료해서 생각해낸 것이 학교교실이었다. 곧잘 교실의 뒷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지만 교장선생 아들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던지 선생들마다 서둘러 나를 다음 교실로 보내는 것이었다. 오전 중에 여러 교실을 한 바퀴 돌아서 매일 졸업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학교공간의 기본적 성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물론 학교공간의 자유로움을 보다 객관적인 영역으로 키워내려고 하고 있지만 어차피 일상에 쫓기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리란 점을 알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일관하는 사회의 근본적 성격에 관한 것에서부터 동양고전과 탈근대 철학 그리고 생명이란 죽음이라는 열역학적 평형상태를 향하여 달려가는 물질운동이며, 인간은 “우주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라는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나 자신도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나의 수형생활 20년 가운데 독방에 있었던 기간이 약 5년 정도가 된다. 물론 여러 번에 나누어 지낸 것이긴 하지만 이 5년간의 독방시절에 열중했던 것 중의 하나가 명상(冥想)이었다. 구속(拘束) 취조(取調) 재판(裁判) 언도(言渡) 등 불안과 초조로 점철된 나날을 거치는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심신을 다시 조각모음 하듯 정리하고 싶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명상이 가져다 줄 지극히 명징(明澄)한 정신의 영역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상이 그러한 정신영역으로 인도해주지는 않았다. 무념무상의 어떤 지점에서는 우주의 정보체계와 소통되는 극적 체험도 가능하다는 매력적 이론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무념무상의 단계에서부터 실패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대로의 명상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명상이라기보다는 추체험(追體驗)이었다.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다시 호출하여 그 의미를 재음미하는 방식이었다. 나만의 면벽명상(面壁冥想)인 셈이다. 내 경우에는 4살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억 중의 상당부분은 그 후에 부모나 할머니가 주입한 것인지도 모지만 아무튼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부터 겪은 일,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시 호출하여 그 의미를 재음미하거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그 사건과 그 사람을 재구성함으로써 다시 한 번 체험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그 때 불러내었던 추체험의 내용들을 세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명상에서 매번 깨닫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극히 사소한 사건 이를테면 이웃 간의 다툼이나 아이들의 싸움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실상은 해방 전후의 치열했던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하고, 또 잠시 스치듯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지속적으로 나를 적시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오랫동안 함께 하였지만 의외로 내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이 지극히 작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큰 것과 작은 것이 전도(顚倒)되어 있기도 하고, 나 개인의 호오(好惡)가 과도하게 개입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투적 관점이 나를 대신하고 있기도 하지만 독방의 면벽명상은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독법(讀法)과 나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귀결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면벽명상의 잠정적인 결론은 내가 만나고 겪은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들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은 곧 그 개인 속에 체화(體化)된 시대의 양(量)이라는 것이 현재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건져내는 많은 추억들은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맥락에 의해서 선별되고 또 전체맥락 속에서 각각 다르게 재조직되고 있다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쓰고 있는 고교시절의 추억호출 역시 그러한 추체험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이 상대적으로 적게 추억되는 것도 고교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가 몰두해온 생각의 맥락이 그 시절을 한 걸음 비켜 서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맺은 모든 사람들과의 추억을 서둘러 닫아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지금의 고민이 그것을 비켜가고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더 많은 추억을 재구성하게 되리라는 예상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부산상고 3년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상당한 정도의 좌절감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기간이었고 또 그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시 유행하던 지적 유희에 일정하게 포섭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몇 분 선생님들의 교과서 외의 메시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가난하고 불행한 시대가를 통하여 낮은 수준의 정서적 민족의식을 맹아형태로 지녔던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러한 정서 외에 실업계고등학교가 정서적으로 매우 건조하다는 생각에 부대끼고 있었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미성숙한 사고마저도 실업계고교에다 그 원인을 전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래저래 부산상고는 그 이후 오랫동안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을 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실업계고교가 아닌 인문고교를 다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컴플렉스로 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를 맞게 된다. 구속과 무기징역의 시작이 그것이다. 무기징역은 고교시절의 자의식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부대끼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참으로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사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없지 않았다. 소위 학생운동에의 투신이 그러한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학생운동은 기본적으로 엘리트 의식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이 요구되는 자기 변혁에 관한 고민이 동반되지 않았다. 여전히 뛰어난 이념적 논리가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고등학교가 담고 있는 그 서민적 정서가 주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형생활 더구나 무기징역은 달랐다. 그 때까지 남아있던 소아병적(小兒病的) 사고의 잔재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엄청난 전기가 되었다. 세상의 낮은 바닥을 마치 무릎으로 걷듯이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임으로써 그때까지 내가 버리지 못했던 엘리트 의식과 인문고 컴플렉스는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부산상고가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님은 물론이다. 부산상고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정신적 편력에 있어서 부산상고는 새로운 사고로 나아가는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했었고 더욱이 친구들의 삶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경험도 없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의 전체적 이미지는 매우 서민적이었고 나도 총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상당히 많은 동창생들이 나처럼 취업을 위하여 부산상고로 진학했었고 졸업 후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친구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서울상대에 합격하고서도 입학하지 못한 친구도 생각이 났다. 우리사회에서 일류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침통하게 깨닫는 과정에서 부산상고는 내게 상당한 위로가 되고 새로운 의미로 재발견된다. 그 시절 내가 부대꼈던 고민들을 여기서 소상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더구나 부산상고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의미로 재구성되는가에 대한 자세한 검토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의 고민들이 언젠가는 정리된 형태로 소개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무튼 내 삶의 저변을 흐르는 정신적 편력의 어느 지점에 부산상고는 분명한 위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나의 삶속에 포진되어 있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하다. 위로는 사회의 상층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아래로는 힘겹게 살아가는 <대전대학 동창생>들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광범하다. 부산상고의 위상은 아마 그 스펙트럼의 중상위(中上位)에 그리고 중우편(中右便)에 위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동창들 가운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있어서 부산상고는 전체적으로는 이를테면 미드필드에 해당한다. 축구경기는 미드필드에서 승패가 갈린다고 한다. 그만큼 미드필드의 의미는 크다. 다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그 미드필드의 추억이 그리 풍요하지 않다는 점이 새삼스레 서운함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는 분명히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의 연배가 아니다. 미드필더도 아니고 수비수도 아니며 더구나 공격수가 아님은 물론이다. 고교시절의 추억이 갖는 의미 역시 그것이 크든 작든 이미 시효를 다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고희를 넘기고 이제 지난 세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세월을 남겨 두고 있다. 이미 상당한 수의 친구들이 타계하기도 하였다. 그 아쉬움 때문에 고교 시절을 과도하게 불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드는 것도 그러한 아쉬움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을 완성하는 방법은 추억을 다만 추억으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추억은 추억일 따름일 뿐 다시 불러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청춘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부질없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보다는 남은 세월동안 우리의 삶을 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나 자신부터도 남은 세월을 정리하는데 바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찾아보았지만 현재 내가 집필하고 있는 글에서도 부산상고 시절의 고민은 그리 많이 개진되고 있지 않다. 물론 글의 성격이 그러한 추억을 담기에는 불편한 내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부산상고 이후에 내가 겪은 사연들이 결코 단조롭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추억이란 과거의 산술적(算術的) 재현(再現)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면벽명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술회하였지만 과거는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再構成)되는 것이다. 현재의 내가 어떠한 고민, 어떠한 철학 그리고 어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같은 과거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재구성이나 단 하나의 재구성이 아니라 부단히 재구성되고 여러 형태의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남은 세월을 정리한다는 것은 어떠한 맥락, 어떠한 가치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할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재구성 과정에서 우리들의 고교시절은 저마다의 삶 속에서 새롭게 호출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어렵던 시절이 빛나는 청춘의 장(場)으로 자리 매김될 수 있도록 아직도 우리들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칠순이면 나이 셈법이 카운트다운 방식으로 바뀐다고 한다. 10! 9! 8! 7! 6! 5! 4! - - - .

나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추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인생은 관 뚜껑을 덮을 때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이 글과 함께 실리는 많은 동창들의 글을 기대한다. 그 글들을 읽게 되면 나의 부산상고 시절도 내가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새롭게 생환(生還)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만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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